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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Jun 29. 2020

법이 정의가 될 때까지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인간은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기억도 있고 취향도 있고 희망적인 영혼도 있는데, 이런 걸 모두 무시한 채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기도 인간을 기계로 여기고 모든 게 조용히 흘러가길 바라면서 부려 먹다가 문제가 생기만 그때 비로소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방식 역시 절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중에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상하죠? “말썽 많던 대한민국의 21대 국회 법사위 첫 회의, 한 여성 의원이 입을 열었다. 법조인이 아닌 자신이 법사위에 앉아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녀의 강단 있는 주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에 법조인들이 너무 많아요” 법조인이 즐비한 법사위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이어서 이 여성 의원은 국회 관행에 대해 비판의 말을 쏟아냈다. “왜 검찰 총장은 법사위에 출석하지 않는 거죠? “, ”판사의 임기가 10년이나 되는 이유가 뭐죠?”라는 그녀의 질문들은 법사위라는 상임위가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인 ‘정의’의 문제를 전복적으로 돌아보게 했다. 법과 정의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법이 정의로우려면 법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야 한다.     


‘시적 정의’에서 저자 마사 누스바움은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 상상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이 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고 입법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공적 상상력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지만, 문학의 형식이 개인의 삶과 사적인 상상력을 통해 고유한 방식으로 이바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비록 법률적으로는 아마추어이며, 법의 세계 바깥에서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사문학에 대한 사유가 특히 법에, 더 넓게는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그 어떤 때보다 굳게 믿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의 정치 경제학적 역할을 강조한다. 윤리적 추론에서 감정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이야말로 사회정의에 대한 강렬한 비전을 내포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해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장인 ‘문학적 상상력’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세 가지 비판 즉, 문학적 상상력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사회적 공의와 정의의 판단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2장 ‘공상’에서 누스바움은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스토리를 통해 1장에서 제기된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하나씩 반박해 나간다. 이른바 ‘공상’이라고 부르는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른 것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며, 복잡한 삶이 투영된 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3장 ‘합리적 감정’에서는 저자 마사 누스바움이 평생을 통해 추적해 온, ‘감정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며, 감정의 정치학, 합리적 감정이 강조되어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검토한다. 공적 추론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감정은 오히려 정치적 나침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4장 ‘재판관으로서의 시인’을 통해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적 공의의 관계를 서술하며, 문학적 공상과 민주적 평등 사이의 긴밀한 공생관계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일찍이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가 외쳤던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문학적 서사의 현대적 버전으로 책을 마감한다.     


누스바움은 법과 경제로 구성되는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다루면서 디킨스의 소설과 휘트먼의 시를 논거로 했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내용을 인용하며, 누스바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중의 삶을 다양하고 풍부한 질적인 구분, 개인의 기능 및 기능에 장애를 초래하는 요소에 대한 다층적인 설명 등을 통해 보여주고, 또한 인간의 복구와 기능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을 지극히 주체적인 맥락 안에서 사용하면서, 소설은 삶의 질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며, 독자로 하여금 평가를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이는 이후의 양적인 평가에 근거한 단순화된 모델이 형성되어야 할 범위 내에서, 공적인 업무에 적합한 종류의 상상력의 틀을 보여준다.”   

  

누스바움은 수년간 미국의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정규 과정의 강의를 진행했는데, 저자는 이런 사실을 통해 법 전통에서 강력하게 제시되었던 인간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공적 합리성 개념에 관한 연구 및 이에 대한 이론적 변호에 대한 수요가 법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또한, 휘트먼의 시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것의 가장 완벽한 표현임을 강조하면서, 시인은 변덕스럽고 유별난 창조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공정성의 규범과 역사 모두에 고정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의 주장을 적절하게 숙고하는 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스바움은 ‘시인-재판관’이란 언어를 창조적으로 도입하는데,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위협받는 공정성을 수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재판관’이라고 정의하며, 다음과 같은 휘트먼의 시를 인용한다.      


“이 나라에서 시인은 한결같은 인간이다./그 안에 있지 않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물들은 괴상하거나 과도해지거나 온전하지 않게 된다.(...)/그는 모든 사물들이나 특성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을 부여한다./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열쇠다./그는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이다. (...)/부정의 길로 엇나간 세월을 그는 확고한 믿음으로 억제한다./그는 논쟁자가 아니다. 그는 심판이다./그는 재판관이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사법적 중립성’에 대해서는, “중립성은 동떨어진 일반성이 아닌 풍부한 역사적 구체성과 관계하고, 유사과학적 추상성이 아닌 인간 세계에 대한 비전과 관계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더 나아진 세계에 대한 비전과 상상이 바로 사법적 중립성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적 정의’에서 피력된 누스바움의 주장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검찰을 향하여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 인터넷 신문의 칼럼에서 고려대 법학과 교수이자 헌법학자인 장영수 교수는 법은 일관되고 똑같은 기준에 의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공정이란 어느 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는 재판관이다. 그러므로 공정이란 나에게 유리할 때만 찾고, 불리할 때는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불리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 기준이 일관성 있게 적용될 때에만 공정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에 가장 반하는 것이 '내로남불'이다. 나에게 유리한 것은 공정이고, 나에게 불리한 것은 불공정이라는 생각 자체가 공정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     


그러나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1994년 빌 클린턴에 의해 미국 대법관으로 임명된 헌법학자인 스티븐 브레이어의 말을 인용하며, 법 영역의 바깥으로 나가 법을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인문학적 공정은 법적용에 있어서 기계적 일관성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의를 향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집과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르고, 또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정념에 관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지요. 또한, 각각의 이야기들은 남자, 여자, 아이, 가족, 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를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이 이따금 우리를 고층 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수바움의 이와 같은 주장은 ”법은 과학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이기에, 법을 뛰어넘어 인문학 안에서 이해될 때, 실천적 추론의 특별한 탁월함을 포괄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정의라는 속 깊은 뜻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일부 법조인들이 가지고 있는 엄격한 잣대와 일관된 판단이라는 공정의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정의라는 아직 달려보지 못한 괘도로부터 청년들을 탈선하게 만드는데,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에서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기억도 있고 취향도 있고 희망적인 영혼도 있는데, 이런 걸 모두 무시한 채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기도 인간을 기계로 여기고 모든 게 조용히 흘러가길 바라면서 부려 먹다가 문제가 생기만 그때 비로소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방식 역시 절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     


누스바움이 말하는 정의란 바로 풍요로운 동시에 가치 있는 삶의 기회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사회,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며 적절한 사회적 지지와 관심을 받고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수호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다. 그것이 비정규직이라도 말이다.     


디킨스도, 또 그와 문학적 상상력을 공유하고 있는 누스바움도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공의의 강물이 계속 흐를 수 있는 물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원들을 정규직화 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그들을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 태운다는 것과 같다. 지금 그들은 전혀 다른 궤도를 도는 열차에 탑승해 있기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꼬리 칸에서 자신의 운명을 앞칸으로 밀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게끔 같은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정규직화’이다.     


이에 대해 누스바움은 그녀의 또 다른 책, ’ 정치적 감정’에서 야누스의 얼굴을 하는 애국심은 과거의 영광, 위대함, 상실과 고통을 통해 만들어지며, 이는 탐욕과 이기주의를 넘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으며, 도덕적 동기를 강화하는 대신 공정한 원칙을 위협하기도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4월 23일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최고조에 이를 당시, 경향 신문과 메일을 주고받는 인터뷰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의에 관한 생각을 드러냈다.      


”저는 시장경제를 내던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성장의 큰 동력이고 빈곤과 불행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구해냈습니다. 우리의 평균수명도 1900년보다 두 배 길어졌고요. (저는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이 쓴 <위대한 탈출>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잘 규제할 필요가 있죠. 확실히 미국은 건강보험 문제에 있어서 잘못해오고 있어요. 그리고 앞서 흑인에 대한 편견이 낳은 결과가 차별에 대한 성찰을 촉발했듯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정의에 대한 논쟁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구현해야 할 정의는 인간이 각자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도록 존중하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은 제가 주장하는 역량 순위에 있습니다. 인간의 역량을 창조하는 조건을 10대 핵심 역량으로 정리했지요.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조건, 건강을 보호할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신체 보전, 자존감을 지키며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조건 등입니다. 모든 항목에서 최저 기준을 채운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불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는 질 낮은 교육을 받아도 되고, 일할 기회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 평등을 추구하는 일은 어떤 분야에서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인간의 역량을 개발하기란 참으로 복잡한 일이죠왜냐하면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매우 품위 있을 수 있지만다른 면에서는 자못 끔찍할 수 있거든요. 저는 노동계급의 삶이 반드시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엄청나게 성차별적이고 호모 포비아적이었답니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삶의 기본을 보장받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은 줄어들 겁니다두려움이 줄면 혐오도 줄어들죠우리 자신이 취약할 때 다른 집단에게 그 탓을 돌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거든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료 시스템을 강화하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모두가 교육받을 기회를 누리는 안전망이 갖추어진다면 불안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요컨대 우리는 전방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또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 분야 활동가들을 뒷받침하는 용감한 지지자가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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