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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Aug 29. 2019

거짓과 진실 사이

거짓말의 역사 (쟈크 데리다)

거짓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틀린 정보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설사 거짓이라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그리고 남을 속이려는 의도 없이 그에게 이런 착오를 전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의 진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단순히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일 뿐,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씨는 김영삼 씨에게 패배했다. 개표 다음 날 정계 은퇴를 발표한 김대중 씨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5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한 약속을 깨고 정계에 복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 네 번째 대선에 도전했다. 


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그의 경쟁자였던 이회창 씨는 정계 은퇴 번복의 역사를 들어 김대중 씨를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씨는 “자신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단지 약속을 못 지켰을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김대중 씨의 정계 은퇴 번복이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그냥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을까? 좀 더, 나아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 거짓말은 다른 것일까? 이 책에서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파생되는 의문에 대해 참고가 될 만한 몇 명의 해석적 관점을 도입한다. 바로 칸트, 루소,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다.     


칸트의 관점에 따르면 김대중 씨는 명백한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이나 진실성의 의무에 대한 칸트식 정의는 매우 형식적이고, 명령적이며,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유용한 거짓말 혹은 배려를 위한 거짓말, 친절한 거짓말 따위는 용인되지 않는다. 그는 거짓말에 대한 역사적 고려를 배제한다.     


한편, 루소는 칸트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루소가 저술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라는 책에서 타인이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는 루소의 견해를 추출한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루소는 이것을 ‘허구’라고 말했다. 따라서 루소의 의견에 따르자면 김대중 씨의 정계 은퇴 선언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구이다.     


또한, 데리다는 당사자가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의해서 한 말이라면 그것의 진위와 상관없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기초한 거짓말의 관점을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짓에 관하여’라는 논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을 믿거나 진실로 여긴다면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게다가 믿음과 견해는 다르다. 믿는 사람은 그 진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서도 믿는 대상에 대해서는 때로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의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조차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충분히 믿을 만해 보이는 사실이나 진실로 간주하는 의견을 진술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주 교도였던 김대중 씨가 정계 은퇴를 발표했을 당시 정말로 은퇴할 생각이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으나, 이후에 생각이 바뀐 것이라면 최소한 교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데리다가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인용하여, ‘거짓말’의 개념을 분화, 확장하는 까닭은, ‘참과 거짓’을 가리는 방식으로는 거짓말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구조적인 이유로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한 것은 참이 아니다. 분명히 내가 틀렸지만, 나는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의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상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의 역사’는 1994년에서 1995년까지 파리 사회 과학고등 연구원에서 열린 데리다의 세미나 일부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강연 록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해체론적 방법으로 철학사에 다루어진 거짓말 개념을 추적하며, 이를 국가적, 사회적 개념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그 이론적 매개로서 한나 아렌트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아렌트가 루소나 칸트의 ‘거짓말’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는 이유는 오늘날 ‘정치로서의 거짓말’의 개념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가 아닌 역사의 수정, 매체를 통한 정치적 프로파간다. 정치 논쟁의 장에서 거짓말이 성장과 확대를 통해 한계에 도달한 상황, 다시 말해 거짓말이 절대적 위상을 획득한 상황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완전하고 결정적인 거짓말의 가능성’은 현대적 사실 조작에서 발생한 위험이다. 심지어 정부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하고 그것을 말하는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자유 세계에서조차도 거대한 ‘이익 집단’은 예전에는 외국 관련 일들을 다루는 데 한정됐거나, 극단적인 남용의 경우 분명하고 현재적 위험에만 한정됐던 일종의 ‘국가 이성’의 사고 구조를 일반화했다. 그리고 정부의 단계적 프로파간다는 매디슨가의 약삭빠른 사업 수단과 방법을 배웠다.”     


한편, 자크 데리다는 거짓말을 어떤 사실이나 상태로 파악하는 전통적 정의에 반해서, 거짓말을 의도적인 행위, 즉 ‘거짓말하기’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무엇이 거짓말인가’라고 묻기보다는 ‘거짓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무엇보다도 ‘거짓말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수행성(performativité)의 차원에서 ’ 거짓말‘의 개념을 파악해야 하며, 거짓말에 맞설 때조차도 거짓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보다는 거짓말이 무엇을 약속하고 어떤 사건을 만드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데리다의 관점이다. 이는 데리다 자신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칸트도 아렌트도 제기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거짓말을 수행성의 차원에서 파악하면서, 데리다는 사유의 장을 철학사로부터 미디어 세계로 확장한다. 그가 든 예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1995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정부가 반세기 동안 묵인해온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의 범죄에 대한 사과문 보도이다. 두 번째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수많은 역사학자의 증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을 정당한 결정으로 간주하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재고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데리다가 세 번째로 든 예는, 1995년 2차 대전 종전 기념 담화에서 무라야마 토미치 총리가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사과했던 소위 ’ 무라야마 담화‘이다. 데리다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하여 이는 국가의 책임을 개인적인 참회로 대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자국민도 아닌 사람들의 죽음에 국가가 슬픔을 표현할 때, 국가의 애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렇다면 이후에 국가는 어떻게 용서를 구하거나 해명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무라야마 담화는 국가적 사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잘못의 효과를 완화하고자 잘못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에 성격이 전혀 다른 실수의 언어와 결합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매디슨가의 약삭빠른 상술‘일 수 있다.     


일본과 미국의 예를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한 데리다는 자국, 즉 프랑스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동안 프랑스 대통령들은 나치와 협력했던 1940~1944년의 프랑스, 즉 비시 정부를 프랑스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이 시기에 페팅이 행했던 유대인 추방은 프랑스가 저지른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1995년 시라크는 전격적으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비시 정부를 현재의 프랑스 정부와 연속 상에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단절로 파악할 것인지에 따라서 거짓말의 위상이 달라지는 국가적 수행성이라는 내용적 문제를 넘어서 데리다는 이를 보도한 ’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에 주목한다.     


뉴욕 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토니 주트는 ’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시라크가 과거의 진실을 밝힌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한편, 반세기 동안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대체로 먼 곳인 마다가스카르, 콩고, 베트남 등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해선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본인들의 국가에서 행해졌던 범죄에 대해선 기이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데리다는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토니 주트와 같은 주류 미국 지식인들의 비판에 대해 ‘반 진실’(Contre-vérité)이라는 논점으로 사실을 재조명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프랑스 지식인들은 분명 시라크 이전에 미테랑 정부에 비시 정부의 악행에 대해서 책임질 것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으나 토니 주트는 이를 무시했거나 확인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쓴 토니 주트의 칼럼은 유력 신문의 영향력과 대학교수라는 권위가 결합하여 사실과 다른 진실을 만들어버렸다. 칼럼 발표 나흘 후, 일리노이 대학교의 조교수, 케빈 앤더슨이 반박 기사를 내긴 했지만, 이 역시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지식인의 위선적인 침묵’은 ‘하나의 진실’로 유통된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매우 자성적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다. 그는 프랑스 지식인을 규탄하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거짓말로 규정할 수 있냐고 질문한다. 그들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독자를 속였던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정보 부족에 따른 실수라고 할 수 있는가? 데리다가 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안에 대한 데리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된다.     


“어떤 결론에 이르기 위해, 즉 프랑스 지식인들과 정치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논조에 맞춰 ‘진실의 어떤 효과’를 생산해내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 서둘렀다”     


데리다의 발화 수행론적 관점에서 보면, 위의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어떤 효과’ 즉, 지식인들의 위선적 침묵에 대한 경고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관련된 투고를 했고 하지 않았고의 문제는 ‘서두름’ 속에서 무시되거나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매체에서 보도되는 잘못된 뉴스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거짓말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이러한 뉴스의 특징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했던 ‘속이려는 의도’가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데리다의 주장은 여기까지이다. 그는 거짓말을 근본적인 악과 인간 존재의 기원적 타락의 표시로 간주하는 유대-그리스-칸트적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이 같은 역사, 거짓말의 역사는 지식의 이론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로 결론에 대신한다.      


독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데리다의 태도에 실망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쩌면 가장 해체주의적 태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 책의 서문에서 서술된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 그의 생각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거짓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틀린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설사 거짓이라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그리고 남을 속이려는 의도 없이 그에게 이런 착오를 전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의 진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단순히 틀린 것을 말하는 것일 뿐,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정직과 거짓말그리고 의혹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라! “라는 아베 총리의 동어반복에 대해, ”정직하라!”라고 강하게 반격한 적이 있다. 여기서 ‘정직하라는 말’과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정직하라!”라고 말할 때는 일본이 역사적 진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식민지의 불법성과 1965년 한일협정,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이를 모른 척,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아베와 정치적 문제를 통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강경화 장관의 주문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한 고노에게 ‘정직하라는 말’과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같은 개념으로 발화된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를 향한 루소와 칸트의 거짓말에 대한 개념은 일치한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만은 아렌트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다. 아이히만을 취재하면서 체험한 ‘국제적 언론이 발휘하는 자본-기술-미디어의 힘’을 절감했던 아렌트가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잘못된 보도에 대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 이렇게까지 발화된 적이 없었다고 비관적으로 논평했던 사실과 이에 대한 해독제로 ‘절대적 거짓말’의 불가능성을 예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무리 거짓말로 진실을 덮으려고 해도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진실에 기대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짓말로 진실을 전부 가릴 수는 없다는 아렌트의 ‘절대적 거짓말’ 이론은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노화된 느낌이지만, 아렌트는 거짓말이 ‘재현물’에서 ‘대체물’로 지위를 옮겨가는 현상을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적 거짓말의 과정은 진실의 은폐가 아니라 역사와 현실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한일 관계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주장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비교적 최근 현상, 즉 역사 다시 쓰기와 이미지 생산, 여러 정부의 정책에서 명백히 드러난 사실과 여론의 광범위한 조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외교와 정치권 권한의 역사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는 정치의 전통적 거짓말은 일상적일 수도 있고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비밀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어쨌거나 완료된 사실 수준의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여러 의도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 이 점은 다시 쓰기의 경우에 현대사를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매우 분명하고,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이미지 생산에서도 그렇다.”     


한국의 정치 풍경에서 거짓말과 진실은 혼재되어 있다. 정치 지도자나 유력한 정치인에 대한 루머와 비난들이 그렇고, 각종 정치 사안이나 사회적 이슈들의 사실 관계 역시도 그렇다. 의도적인 거짓이 있는가 하면, 부주의한 허구도 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파괴적으로 작동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력 정치인이나 국가 지도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의 저짓말은 진실의 은폐에서 끝나지만 국가 지도자의 거짓말은 역사와 현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관점에 따라, 이것이 진실의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한 희생이나 대가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왜곡된 정보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매체에 의해 발화되는 수행성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기는 한다.


데리다의 '거짓말론(?)'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고, 그의 이론이 사회에 악한 영향을 줄지 선한 영향을 줄지 역시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데리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통념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보를 거짓말로 치부하게 되면 그것은 선한 영향력의 문제가 파괴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을 흔히 '일관성이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세상일이란 다 그렇다. 그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틀릴 수 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은 주로 자기중심적인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하는데, 사실 로멘스는 로멘스고 불륜은 불륜이다. 로멘스와 불륜은 동일한 행동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며, 우리는 그 차이를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즉 '로로불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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