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순간 영혼 속 깊이 들어온 책들이 있지요. 저에게는 그중 하나가 바로 '바가바드 기타'입니다. 왕위를 놓고 사촌 형제들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아르주나, 차라리 칼을 놓고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지만, 그의 마부로 현신한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은 지혜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대가 전쟁에서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이를 것이요, 승리한다면 이 땅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싸우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하고 일어서라. 고통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이 위대한 전투에 뛰어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악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전투에 뛰어듦으로써 악에서 벗어난다.”라는 말은 카르마 요가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적 지혜’와 ‘행위의 법’입니다. 초월적 지혜를 포기하고 행위의 법을 강요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길은 둘이 있다. 초월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갸나 요가의 길과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동하는 법을 익히는 카르마 요가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가늠하기 쉽지 않은 노래 속에서 초월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지혜를 채굴해 낼 수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아르주나가 마주한 전쟁과 같아 매순간 연민과 의무와 갈등, 그리고 강요된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는 행동”으로 우리가 이 고통의 전장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에게나 오래 간직된 서사가 있습니다. 오래된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릴 적 포기한 꿈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낡고 희미해진 서사의 가닥에는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20대에 가졌던 작가가 되고 싶은 꿈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 그 아슬아슬한 세계를 살아보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일이 늘 문제였죠.
결국,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이 남아있던 20대, 실패의 화살은 곧 불행한 인생에 닿을 것이라는 생각에 실패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어느 정도는 행복했고, 어느덧 은퇴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늦어서 오히려 다행이지만, 크리슈나가 인생에 요구한 데로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20대의 꿈. 글을 써서 성공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가난한 작가라는 20대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은퇴자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두 번의 ‘YES’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이란 책에서 철학자 이진경은 “두 번 긍정한 사람은 불행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하기 위해 가난과 무명(無名)의 괴로움까지 기꺼이 겪어낼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YES’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두 번의 ‘YES’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예술가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음악가나 화가, 또는 작가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모두 행복할까요?. 아니 ‘예술가’란 단어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먹고사는 일보다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한다 해도 두 번의 긍정으로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의심이 앞섭니다.
불행이나 행복과 같은 것은 상태(狀態)가 아니라 동태(動態)이기 때문입니다. 빈궁한 처지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예술가들도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고, 꿈을 버리고 하고 싶지 않은 일로 성공한 사람도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흔히들 말하죠. 역시나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계란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2011년 정월 엄동설한, 서른두 살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월셋집에서 굶어 죽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방에는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죠. 밥과 김치는 예술가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박한 백척간두의 문제입니다.
은퇴하고 나니, 다행히도 두 가지 질문 중 두 번째 질문의 내용이 조금 바뀝니다. “가난하고 괴로워도 기꺼이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행복하다면 계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이죠. 은퇴자의 삶이란 성공이 행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행복이 곧 성공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무 살의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은퇴 후 삶을 주제로 하는 책, 유튜브, 강연을 보게 되면, 8할이 돈과 일, 그리고 시간에 관한 내용입니다. 노후 자금, 실업 급여, 의료 보험, 최소 생활비, 소일거리 등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은퇴 후부터 정상적인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10년에서 15년 정도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며, 자신이 가졌던 오래된 꿈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의 마지막 기회이니까요.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 우리가 110세 정도 산 다음, 20대의 나에게 돌아가 자신이 겪은 인생의 경로에 관해 설명하고, 조언한다고 한들, 20대의 내가 110세의 나의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 내가 20대의 나에게 돌아가, 살아온 인생을 풀어낸다고 한들, 그것을 주의 깊게 들을 20대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몸과 귀를 기울이며 온 영혼을 쏟아내어 그 소리를 들으려 할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60대가 20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20대가 60대에게 속삭이는 일종의 ‘침묵의 소리(sounds of silence)’입니다.
그러니 유튜브나 책, 강연에서 이야기해 주는 노후 대비책이나 은퇴 후 삶이란 주제의 실용 지침과 함께 스무 살의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누구에게는 회한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용기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 남은 생에 쉽게 버릴 수 없는 꿈 이야기 말입니다.
살아봤지만 여전히 궁금한 20대, 살아보지 않았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은 60대. 60대의 아르주나에게 20대의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은 변주를 들려줍니다.
"그대가 삶에서 실패한다면 인생의 로망을 이룰 것이며, 성공한다면 현실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은퇴자여, 20대의 꿈으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하고 일어서라. 고통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남은 삶에 뛰어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