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 같은 인생
오래전 알고 지내던 대기업 임원은 은퇴의 시점에 “이제 더는 종으로 살지 않겠다”라며 호기 있게 선언했었습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다른 회사에 들어갔고 이전보다 더 절실하게 자신이 말한 종살이 시스템에 녹아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중성을 빌미로 그의 해방 선언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허세,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 허세는 일종의 ’ 속이는 행위(bluffing)’로 정의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허세는 오히려 ’ 자기 증대(self-aggrandizement)‘에 더 가깝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자아(ego)를 과장하거나 강화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즉, 개인의 자아를 중심으로 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부풀려 자신을 과시하거나 강조하는 행위를 말하죠.
경력 단절의 위기에 표현되는 일종의 자기 증대는 자아 신뢰의 과도한 형태로 보입니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를 강화하고자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능력, 성취, 지위 등의 강조를 통해 자아의 안정성과 인정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퇴에 즈음한 해방 선언은 자아실현, 성공, 명예와 같은 것들을 추구하는 동기의 좌절, 즉 관성의 소멸과 관련돼 있습니다.
동기가 좌절되거나 자기 발전의 관성이 소멸하였을 때, 의지의 표출 방식은 허세의 모양(?)을 가졌고, 그 허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아에 대한 인식, 즉 정체성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면 은퇴에 즈음하여 “더는 종으로 살지 않겠다”라고 한 선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자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전 직장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재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은퇴는 실패가 아니라 소극적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경력의 단절을 심리적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일종의 방어 기제가 아닐까요. 현실의 나와 신념 속의 나 사이의 괴리감,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경계인 정체성에 가까운 것이겠죠.
사실 우리는 종으로 살 수도 있고, 자유인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개인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먹고살아야 하며, 먹고사는 문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라는 생존 구조 속에서 종이라고 해서 자유가 없는 것도 아니며, 자유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해방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종과 자유인 사이, 그 어딘가에 있습니다.
종과 자유인, 진짜의 나와 가짜의 나, 이러한 이분법적 정체성이 위험한 이유는 이것이 매우 경직된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은퇴 후의 자유로운 나와 직장에서 구속된 내가 다르다는 선언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머릿속에 상상해 낸 무언가 고정된 정체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정된 정체성의 이미지는 무너질 때 커다란 구멍을 남깁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다수 개인의 머릿속에는 어느 정도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완고하고 단순한 생각들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소리 없는 생각의 메커니즘이 제작해 낸 자신의 이미지, 즉 경직된 정체성이 허물어지면서 만들어진 큰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허세라는 치장된 갑옷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을 인용한다면, 정체성이란 ’ 기억’과 같은 단어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오직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뉴럴링크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간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커틀러는 ‘투모로우 랜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인드 업로딩이란 한 개인의 기억을 전기 신호로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그 기억을 다시 재생하는 기술을 뜻합니다. 만약 한 개인을 특징짓는 것이 그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면, 그 기억의 총체를 '업로딩'하는 기술은 그 개인을 부활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죠.”
그러나 기억만으로 정체성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정체성을 떠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 관계‘입니다. 만약 나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 불비(不備)된 관계는 정체성의 위기로 이어지겠죠. 이것은 일종의 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소수자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감당하면서까지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 심지어 수술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변형시키면서까지 정체성의 괴리를 좁히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기억과 관계의 괴리, 정신적 정체성과 신체적 정체성의 괴리, 그런 괴리감에서 벗어나 두 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는 온전한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죠.
신념, 가치, 경험, 성(sex)을 포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개인적 감각이 문화적 또는 사회적 소속과 인종, 민족성, 성별(gender)과 같은 사회적 구분과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괴리. 그것이 바로 은퇴자들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괴리의 계곡입니다. 은퇴로 야기되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 과정은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자아의 일관성과 사회적인 기대 사이의 갈등. 일상의 분리와 현실의 변형 등, 바로 정체성의 위기 그 자체입니다.
사회적 은퇴는 우리를 새로운 개인사(史) 속에 던져놓습니다. 수입이 줄어들고 역할이 축소되며 영향력이 약해지는 부정적 변화,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추동하는 정체성의 혼란, 과거와 현재의 괴리와 미래의 실존에 대한 고민. 버티고 있던 ’ 기억의 기둥’과 무너져 내린 ’ 관계의 기둥‘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만 하는 숙제들.
회식 자리의 리더에 대한 농담이 있습니다. 회식 자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여 직원들과 건설적인 대화를 하고자 하는 리더가 가장 나쁜 리더, 회식 자리에 아예 참여하지 않은 리더는 좋은 리더, 그리고 최고의 리더는 잠깐 참석했다가 법인 카드만 남겨두고 떠나는 리더라고 합니다.
이 농담은 단지 ’ 권력의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열린 생각과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랫세대에게 환영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끔 TV에서 원로 가수나 배우들이 후배들에게 지나치게 환영받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매우 불편한 연출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경은 존경에서 끝나야지 환영까지 기대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른바 ’ 손이 많이 가는 사람‘, ’ 신경이 많이 쓰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시기가 돌아오면 예외 없이 경계인의 감정에 빠져듭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소속되어야 하지, 나의 사회적 관계망은 공원이나 산이나 노인복지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가?”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인간성장보고서가 내놓은 이른바 ’ 행복의 조건’에는 48세 이전에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아랫세대와의 공동체 활동이 노년의 행복을 유지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랫세대에게 환영받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반짝이던 진주가 사라져 버린 세대는 환영받지 못하기에 결국, 새로운 경험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일만은 아닙니다. 과거 정체성의 핵심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 자유로워진 정체성, 그래서 더욱 다양해진 정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다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더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다발로 인식하고 고정불변의 진주라는 생각에 저항한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우리에게 영구불변의 핵심이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게 된다. 대신 우리의 정체성 중 일부는 자기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비록 이것이 무(無)에서부터의 창조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뿐 아니라 몸, 사회,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The shrink and The sage’ 中에서)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날 위해 술 한잔 사주지 않던 인생이 갑자기 나에게 정체성이란 진주를 던져 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연인에게 내밀었던 꽃다발과 같은 그런 정체성을 이제는 나를 위해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립니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오늘도 고도가 오지 않자, 자리를 뜨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뮈엘 바게트가 쓴 부조리극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희곡 속 두 사람은 기다림이 오래되자 자신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기다리는 장소가 맞는지 불분명해지는 것을 감지합니다. 두 사람은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하기, 춤추기 등을 계속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에 대한 막연한 소식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허무주의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죠.
바게트 자신이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에 대한 해석을 열어놓았기에 우리는 이를 여러 가지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고도를 인간의 정체성으로 정의한다면 이를 찾기 위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하기, 춤추기 등은 일종의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자리를 뜨기로 합의한 두 사람이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종의 ‘불안’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리를 지켜도, 자리를 떠도 불안은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두 사람은 불안을 피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두 사람 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했을지 모릅니다. 또는 고도라는 인물에 대한 재맥락화의 쳇바퀴를 돌려 불안을 숨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정체성은 결국 불안과 연결되어 있고,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러한 불안은 더욱 복잡해졌을 뿐 아니라 은퇴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이란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후기 산업화 시대 불안의 속성을 파고듭니다. 그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1. (돈, 사랑 등이) 충분하지 않다.
2. 사람들이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3. 좋은 것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
4. 사람들이 나의 실체를 알아챌 것 같다(즉, 내가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5. 내 삶이 덧없다(즉,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살레츨은 이러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사람들은 보통 자기 계발 구루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유튜브를 보면 ‘은퇴 후의 삶’이라든가, ‘은퇴 준비하기’라는 주제의 영상들이 많이 올라있고, 구독자 수도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또한, 살레츨은 이런 불안 목록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주로 걱정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 및 자신과 타인 사이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맞는다면 은퇴자가 느끼는 불안 역시도 ‘위치’와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불안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주체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자기 인식이 달라질 때 생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변을 살펴보면 늙어서도 사업을 지속하고 있거나 늦은 나이에도 직장에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무리 자신의 삶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이런 주변의 풍경에 눈길이 안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불안이 찾아오고, 자신의 삶에 대한 재맥락화가 다시 시작되죠.
그러면서 또다시 자기 인생의 방향을 놓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즉문즉답으로 유명한 법륜 스님은 ‘행복한 출근길’이란 책에서 “흔들리다 어느 바람 잦은 날, 물가에 떨어지고 마는 낙엽 같은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낙엽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컴퓨터의 도움을 조금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용자의 실수나 프로그램의 오류로 컴퓨터가 정지되거나 시스템 환경이 변경되어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재부팅이라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전원을 차단해 사망상태로 만든 다음, 다시 에너지를 공급하면 모든 소프트웨어가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재부팅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기존의 OS(operating system)를 포맷한 다음 다시 설치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우리의 OS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우리의 OS가 ’ 삶‘이었다면, 은퇴 이후 삶의 OS는 ’ 죽음‘이 되겠지요. ‘죽음’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음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늙어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삶이 소중한 것은 미래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간 그 자체이고, 죽음은 시간성에 대한 의식입니다. 때문에, 죽음까지의 시간성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 생물학의 이론을 세우고, 진화생물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교수 데니스 노블은 4년 전 한국의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여든과 아흔 사이, 그는 여전히 오래된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실상사에서 이루어진 대담에서 노블 교수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역시 시시각각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 죽음은, 우리가 삶을 조심스럽게 대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죽기 이전의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삶은 무엇인가에 더 집중해야 할 겁니다.” (‘오래된 질문’ 中에서)
노블 교수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여든을 넘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인생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시시각각 죽음에 다가가면서 우리의 삶은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더 집중해야 한다.”라는 말은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는 뜻일 텐데, 이제 바뀐 인생의 OS 위에 가동될 프로그램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통계적으로, 60세에 은퇴한 은퇴자는 앞으로 이삼십 년 뒤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 위에 자신의 영점(zero base)을 세우고,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기사의 갑옷이나 칼에 박힌 보석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연인에게 내미는 꽃다발과 같은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