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편적인 인간 경험으로서의 죽음
“하늘의 푸른빛이 그 뒤를 이었다. 마치 배수구로 물이 빠지듯, 높은 곳으로부터 그가 있는 너저분한 콘크리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다음에는 별들이 떨어지면,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하늘의 장식물처럼 그의 주변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고정한 압정이 빠진 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검은 공간이 지하실의 잡동사니 더미 전체 위로 늘어져, 조지의 혼란스러운 소멸을 덮어버렸다.”
주인공 조지의 ‘혼란스러운 소멸’, 즉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지는 암으로 인한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단상과 기억들을 정교하게 조립하며 아버지 하워드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땜장이이자 뇌전증 환자였던 아버지의 기억은 조지의 경험과 교차한다. 할아버지 하워드는 땜장이였고, 아버지 조지는 시계수리공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의 여정, 그리고 북방의 우주와 사람 속에서 시간은 소멸하고, 복잡하지만 심오하게 늘어진 생은 마침내 겹쳐져서 그 차이가 사라진다. 임박한 죽음, 아버지 조지 워싱턴 크로스비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현관 층계에 있는 노인이 아버지임을 알아본 순간, 열두 살 소년 시절의 그 자신과 중년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지금의 그 자신 사이의 그 모든 시간이 영(零)으로 줄어들었던 일은 기억했다.”
이들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건 속에 생을 마감했을까? 이 소설 속에서 그런 것들을 중요하지 않다. 작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집중하는 경험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의 경험이고, 공통의 경험은 개별의 경험을 넘어선다. 그래서 삶의 형이상학이 탄생한다.
소설 속에서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흐른다. 세대를 걸치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수시로 전환되고, 과거와 현재는 예고 없이 바뀐다. 시간은 의미를 잃는다.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가 이 소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폴 하딩은 마치 5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한 번에 그려내는 사람 같이, 여러 세대가 하나인 것처럼, 시간을 뛰어넘은 주문과 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이 소설은 명백히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환각에 쌓인 죽음의 순간, 아버지 조지는 ‘혼란스러운 소멸’에서 의식을 일으켜 세운다. 죽음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아니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결국, 모든 생명에게 죽음은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임을 각인시킨다. 이것이 폴 하딩의 삶과 죽음의 형이상학이다.
“네 아버지가 설교에서 늘 말하고 또 집에서 너에게 말하듯이 그 불확실성은 아름다운 것이며, 더 큰 확실성의 일부라는 것을 기뻐하라. 그리고 도끼가 장작을 물고 들어갈 때, 네 가슴 아픔과 네 영혼이 곧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아직 인간이라는, 아직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해 열려 있다는,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어라. 그리고 네 가슴 아픔에 화가 날 때는 기억하라. 너는 곧 죽어서 땅에 묻힐 것이라는 사실을. “
이렇게 작가 폴 하딩은 역사적인 시간과 개인적인 경험을 연결한다. 노인이 떠나가는 과정과 그가 느끼는 기억, 자신과 아버지, 가족들의 삶과 경험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죽음을 탐구해 나가는 한편, 그 자신이 이 경험의 일차적인 독자가 된다. 작가 폴 하딩에게 있어 작문은 구도이다.
책을 읽으며, 작가 폴 하딩이 발견한 세계와 일찍이 싯다르타가 발견한 인생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단순한 인간의 여정에 개인의 경험과 의식을 연결하여 공감의 주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 속 생의 이야기는 삶의 여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 세대를 가로지르는 기억으로 나아간다.
자작나무(Birchbark) 형이상학
퓰리처상 수상 10주년 기념 출간에 초청된 작가 폴 하딩은 여러 출판사와 에이전트들이 자신의 책을 거부했던 시간을 진술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받은 거절 대부분은 상용구 형태의 편지로 이루어졌고, 아주 일부만이 나름 구체적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폴 하딩의 작문에 대한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에 보통 잠깐 생각하면서 나는 그것들 모두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것들이 내가 읽고 싶지 않거나 쓰고 싶지 않은 종류의 글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거절 편지를 거절했다. “
그가 스스로 작문 교사라 칭하는 사람들조차 그에게 ”출판과 작문을 혼동하지 말라 “고 촉구했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았던 폴 하딩은 출판 시장에서 이 소설 ‘팅커스’의 거절을 감수하며 스스로 ‘출판하지 않는 작가’가 될 결심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작은 출판사로부터 시작한 그의 소설은 결국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정성 들여 읽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이 왜 거절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자작나무 형이상학’에 대한 치명적이고 고풍스러운 관심과 능력에 절망했다고 밝히고 있는 만큼, 작가의 자기 인식으로 가득 찬 이 소설 속에서 독자들은 쉽게 길을 잃거나, 인내심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 나는 만연한 자만심과 유행에 대한 타고난 예술적 성향을 평가하는 데서 오는 자의식에서 벗어나 지적, 미적 자율성을 만드는 자기 인식으로 들어가는 특권을 받았다. “
‘자작나무 형이상학(Birchbark metaphysics)’이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카누, 가방, 장식품, 무기, 도구를 만들 때 사용되는 자작나무(birchbark)를 소재로 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앙과 개념을 말한다. 일종의 애니미즘이자 신비주의다. 특정한 믿음과 실천은 서로 다른 원주민 문화 사이에서 달라질 수 있지만, 자작나무는 자연과의 연결, 조상의 지혜 및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공통 요소로 인식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작나무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영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작나무로 만든 카누, 가방, 장식품, 무기, 도구 안에 신성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자작나무는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 간의 연결을 나타내는 매개체로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매개, 즉 조상이나 영혼들과의 소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자작나무로 만든 카누, 가방, 장식품, 무기, 도구에 무늬를 새기는데, 이는 조상들로부터 이어오는 지식, 이야기 및 가르침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이를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전 세대로부터 전해지는 지혜와 문화를 유산으로 보존한다.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본질, 존재, 지식의 성질 및 정신과 물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는데, 자작나무 형이상학은 이러한 질문을 원주민 전통의 특정 문화적, 영적 맥락에 포함한다. 폴 하딩은 이러한 형이상학을 공통된 인간 경험에 대한 조사와 설명의 억제를 통해 보편적 인간성을 특권 화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글과 글의 온전함은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좋아하는 특성, 즉 고독, 고요함, 자기 성찰, 내 상상이 타오르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한 감각을 점점 더 많이 갖게 했다. 나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영어에 심미적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연습했다. 그로 인해 경험과 의식의 경험에 더 세밀하고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실제로 경험과 의식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다락방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리고 빈 마구간에서 아버지가 우는 것을 발견했다. “
폴 하딩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작업과 글을 읽는 방식은 구분되지 않는다. 폴 하딩 자신이 책을 읽을 때의 가장 좋아하는 특성, 즉 고독, 고요함,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우아한 감각을 유지하며 작문을 하기에, 그의 작품 속에는 ‘자아’가 되는 경험과 단어와 묘사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그가 진행하는 단어와 묘사의 행렬을 견뎌내느냐, 포기하느냐, 또는 이를 즐길 수 있느냐에 따라 독자들의 호불호는 명확하게 갈린다. 그러나 폴 하딩은 이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 듯하다.
”문학상은 항상 소란스럽고 당파적인 관중 스포츠다. 그것은 재미의 일부다. (...) 세상의 가장 깊은 경험에 따라 소설을 쓰는 것의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결과는 분열된 의견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인디언 소년과 독수리
흑백 TV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등학교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당시는 TV에서 제법 예술성을 갖춘 영화들이 방영되곤 했었는데, 그중 하나, 평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남긴 영화가 있었다. 제목도, 감독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인디언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인디언 소년이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맨손으로 독수리를 잡아야 한다는 부족의 규율에 따라 사막을 여행한다. 마침내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를 발견한 소년은 독수리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몇 날 며칠, 광활하고 척박한 사막 위에서 독수리를 따라가던 인디언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독수리와 영적인 교감을 한다.
사막에서 독수리를 쫓던 소년, 어느새 독수리를 잡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스스로 독수리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자리한다. 결국, 높은 바위 위에 오른 소년은 푸른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친다. 그 순간 소년의 영혼은 독수리가 되고,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소년은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다.
누구에게나 살다가 어려운 순간이 있다. 또한, 대다수 사람은 막막하여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스스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비법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보기도 하고, 파도를 뚫는 휜 수염고래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때론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나비나 하늘을 향해 뻗은 자작나무, 돌 틈에 자라는 들풀이나 서설을 뚫고 나오는 야생화 같은 이미지를 떠 올린다.
나에게는 높은 바위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내리는 인디언 소년의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바로 그런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 이것이 바로 나의 자작나무 형이상학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유, 자유로움, 해방이라는 단어는 결국 내 안에 숨어있는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작나무의 꿈은 어린 시절과 나이 든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비선형적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거부를 거부하는 것을 거부하다.
비선형적 구성의 마술.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작문은 시간에 지배된다. 글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다가 이전 것과 엮이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서 연관된 사연을 만나기도 하지만 시간의 중력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다. 폴 하딩의 작문은 이런 일반적 글쓰기의 중력을 역행한다.
그의 이야기 결론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상세한 묘사, 유려한 단어를 사용하여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문체로 채워나간다. 그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폴 하딩은 자신만의 고독, 고요함, 자기 성찰, 그리고 상상을 위해 수없이 사전을 뒤지고 다시 읽어보고 스스로 만족해한다. 이것이 그가 글을 쓰는 이유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분명히 의도했던 출판이었다. 출판의 대상으로서의 독자는 어떨까? 재질, 재료, 색깔, 상태, 모양, 자세, 장소, 위치, 속도, 온도, 소리, 감정과 비유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관능적 표현으로 팔 할이 채워져 있는 글을 읽는 것은 고통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경험에 동참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나는 어떤 크리스천이 뜻도 내용도 모르면서 성경을 읽으며 안위를 얻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플롯이 없는 글도 감동을 줄 수 있다. 어쩌면 작문은 인과관계가 아닌 직관의 이미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봄에 대한 폴 하딩의 작문을 보자.
“늦봄의 폭풍이 마지막 수선화와 첫 튤립에 눈 모자를 씌웠다. 그러나 해가 다시 얼굴을 내밀자 눈은 녹았다. 눈은 꽃들의 마음을 다잡아 준 것 같았다. 뿌리는 녹은 차가운 물을 마셨고, 줄기는 그 싸늘한 느낌에 허리를 똑바로 폈다. 유연하면서도 강건한 꽃잎들은 진짜 결빙으로 바스러질 듯한 막이 덮이는 일은 면했다. 오후가 되자 따뜻해졌고, 온기와 더불어 벌이 날아다녔으며, 작은 벌들은 저마다 노란 꽃 안에 자리를 잡고 갓난아기처럼 빨아 대기 시작했다.”
폴 하딩의 세계 속에는 눈은 모자가 되고, 해는 얼굴이 되고, 뿌리는 마시며, 허리는 똑바로 세우고, 벌은 갓난아기가 된다. 인간을 자연에 빗대어 묘사하듯, 자연을 인간에 빗대어 묘사한다. 그러면서 자연과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서로를 빗대어 사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창작의 기쁨은 무엇일까? 공유의 욕망일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힘일까?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일까? 창작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조지 오웰이다. 오웰은 자신의 작문과 출판의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이기심. 둘째,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열정과 단어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 셋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웰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쓴다고 했다.
폴 하딩 창작의 이유는 아마도 두 번째 것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창작의 기쁨은 이 중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독서의 기쁨은 이 모든 것이 일정 부분 배분되어 있을 때 찾아온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묘사와 표현만으로 팔 할이 채워진 소설은 솔직히 읽기에 괴롭다.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자작나무 형이상학’의 범주에 드는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코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을 들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죽기 직전 할머니가 작은 나무에게 들려주는 ‘죽음의 노래’는 쉽고, 간결한 문장만으로도 깊은 고독과 고요함, 자기 성찰과 상상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해 준다.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포레스트 카터는 이 책에서 인디언 소년 ‘작은 나무’를 통해 자연이 봄을 탄생시킬 때 몰아치는 산의 폭풍과 새들의 몸짓과 소리의 의미,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노래를 들려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카터는 체로키족의 학살과 남북전쟁을 통해 나타난 백인 미국 사회의 잔혹성과 위선을 함께 고발한다. 이로써 독자들은 자작나무를 역사 속의 나의 나무로 받아들이게 된다.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희열이 있다. 글 속에 있는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무지 찾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작가의 세계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작품의 안과 밖을 뒤져서 작가가 숨겨놓은 세계를 찾아냈을 때 드는 희열은 독서의 기쁨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폴 하딩의 ‘팅커스’를 읽는 재미가 있다. 그가 말하는 ‘자작나무 형이상학’의 비밀도 흥미롭다. 그렇지만 또다시 그의 소설을 읽을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한국인이자 유물론자인 나는 ‘출판을 거부했던 폴 하딩이 출판한 소설’ 읽기를 거부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