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한 꿈, 시간을 위한 시간
이른바 천국, 완전한 행복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복잡하지만 잘 정돈된, 깊지만 투명한 공기가 깔린 바닷가 정류장이었고, 또 한 번은 짓고 맑은 남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빛나고 있는 찬란한 별들과 그것에 닿아있었던 높은 진청색 언덕이었다. 둘 다 꿈에서 본 광경이었다. 현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지금까지는 내가 본 유일한 천국이다.
어떤 연유로 잠을 자면서 꾸는 꿈과 되고 싶고 갖고 싶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같은 단어를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먼 옛날부터 인간은 꿈을 통해 꿈을 보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오늘날 뇌 과학자들은 꿈이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기억이 돌고 돌다가 서로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결합하여 만들어 낸 돌연변이 상상이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결국 꿈은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는 새로움이다.
이런 꿈속 이야기와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바로 유디트 헤르만이다. 대략 10년 전, 그의 ‘여름 별장, 그 후’가 번역되어 국내에 발표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매우 몽환적이고 운명적이며, 고독한 스캔들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해독의 능력이 없었던 연유로 작품 속 이야기의 성격과 패턴과 의미와 지향점에 대한 정의는 독해력에 좀 더 자신감이 생겼을 때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작년(2023년) 단편집 ‘레티파크’가 번역되어 출판된 것을 계기로 마침내 10년 동안 묻어두었던 유디트 헤르만의 문장에 대한 의구심들을 파헤쳐 볼 기회가 생겼다. 냉정히 말하자면 이 소설은 완성도와 재미에 있어서 ‘여름 별장 그 이후’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몽환적이고, 마음의 골목골목을 무심한 듯 지나치면서 독자들의 심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비평가들의 공통된 의견처럼 그녀의 문장은 간결하다. 설명을 생략하면서도 도무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맥락을 이어간다. 서사가 배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문장도 역설을 빠뜨리지 않는다. 악연을 가진 남자, 처자식이 있는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 어린 소녀와 노인, 완벽한 부인과 불안한 여자, 행복했던 시간과 춥고 냉소적인 기억, 소중한 시간과 상실의 아픔 등이 무절제한 듯 혼재하면서도 투명한 질서의 실에 꿰어있다.
유디트 헤르만 소설에는 특별히 많은 인간관계가 등장한다. 더욱이 그 인간관계는 생경한 듯 익숙하고, 낯선 듯, 기시감이 든다. 이런 관계 설정은 이야기의 플롯을 복잡하게 만든다. 복잡한 것은 설명하면 할수록 구차해진다. 그러나 헤르만은 설명하지 않고 기술한다. 그가 무심한 듯 기술한 관계의 복잡성은 다 나아가는 상처처럼 시원함과 불편함 사이를 진동한다. 그리고 결국 중독된다.
‘여름 별장, 그 후’에 묘사된 인간관계의 흔적, “나는 그를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하고 난 다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교제라고 표현했던 관계는, 그 당시 이년이나 지난 뒤였다. “ ”다시 올 거야? 켓의 물음에 크리스티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얼른 ‘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등의 역설적 문장은 이야기 뒤에 이야기, 시간 뒤에 시간을 남긴다.
아직 국내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2015년 ‘레티파크’ 발표 이후 작가는 2021년 ‘우리 집’, 2023년 ‘우리는 서로 모든 걸 말했을 텐데’ 등의 작품을 이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작품과 함께 관심을 끈 것은 작가가 밝힌 창작의 비밀이다. 바로 ‘꿈’. 따라서 10년 묵은 유디트 헤르만의 문장에 대한 숙제를 풀기 위한 열쇠 역시도 꿈이다.
최근 유디트 헤르만은 렘수면 상태에서 떠오르는 디테일 중 사라져 버린 디테일이 자신의 트라우마이며, 이 트라우마의 집합체가 바로 작품의 실체라고 밝힌 바 있다. 유디트는 소설을 쓰기 위해 꿈을 꼼꼼히 기록했으며, 그중에서도 자신이 직접 쓴 기록에는 남아 있으나, 며칠 상간에,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디테일을 작품에 담아낸다고 밝혔다.
“이것은 철저히 내 이야기다.”라고 단언한 이런 창작의 방법과 과정이 그녀가 장편보다는 단편을 쓸데 더 자유로웠다고 말한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디트는 ‘레디파크’의 출판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를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 앞서 나는 장황하고 복잡하며 조금 어두운 장편 소설을 썼는데, 그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신경이 곤두섰다. ‘레티파크’에 실린 이야기들을 쓰는 것은 뭔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시 짧은 텍스트로 돌아갈 수 있어 홀가분한 기분이었고, 이야기들은 가볍고 경쾌하게 절로 써졌다. “
도대체 꿈속의 장면이나 이야기들은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까? 다행히도 많은 과학자가 꿈에 관해 연구했고, 그 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과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꿈은 소위 렘수면(Rapid Eye Movement Sleep) 상태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며, 따라서 낮 동안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은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전전두엽에서 생성되는 신경전달물질이 중단되어야 비로소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단편들과 단상들이 제멋대로 이어지고 부서지고 편집되고 재창조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로 탄생되고, 이 아이디어가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꿈에 보았던 천국, 그 속에 파도와 모래밭, 갈매기 나는 정류장, 하얀 구름, 언덕과 별, 오로라와 어두운 하늘, 처음 보았던 천국의 요소는 그 어느 하나 과거에 실재하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유디트 헤르만 역시도 자신의 소설 중 실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따라서 완전한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실’이란 단어는 두 가지로 정의된다. 첫 번째 정의는 현실이 지각의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건, 현상의 총체라는 것이며, 이는 존재와 존재의 실제적 상태나 사실이 관련된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이나 의식과 별개로 존재하며, 객관적이고 그래서 개인의 주관적 경험 외부에 존재한다.
두 번째 정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아이디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현실은 모두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존재는 정신적 구성이나 아이디어의 상호작용이며, 외부 세계는 정신적 과정의 산물일 뿐이다. 특히나 실존주의에 따르면, 존재는 본질보다 앞서며, 따라서 개인은 행동과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현실과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유디트 헤르만의 창작은 현실에 대한 두 번째 정의 위에 건설된다. 그에 따르면 꿈속에서 본 이야기는 현실이다. 그것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로 적셔지지 않은 건조한(?) 뇌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 해도, 결국 이야기는 이야기다. 새로운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한 상상 속에는 경험하지 않은 요소들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전에 따르면 상상의 존재란 인간이 상상한 겉모습을 가진 존재들을 뜻한다. 그들의 실존은 증명되지 않았다. 인간 존재들, 상상의 동물들, 영적 존재들, 키메라들, 나에게 내 인물들은 다름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내 상상력이 빚어낸 여자와 남자와 아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거의 투명하며 아무리 해도 잡을 수 없는 공기의 정령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전적으로 실화였고, 사실이라는 바닥에 단단히 정박해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내가 알던, 실제로 있던 공간과 장소들에서 일어났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욕구를 네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나아가 사후에 기억되고 꼰대들을 멋지게 누르고 싶은 욕구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또는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이나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 바로 미학적 열정이다.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 사물의 실상이나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에 보존해 두려는 욕구다.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다. 오웰 자신도 스스로 정의한 이 네 가지의 글쓰기 욕망이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글쓰기’ 목적을 ‘글 읽기’로 바꾸어 ”우리는 왜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읽는가?” 이에 대한 답은 ”왜 쓰는가? “에 대한 답과 거의 일치한다.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 했노라고 은근히 자랑하거나, 서점 한구석에서 누구도 보지 않던 보석 같은 책을 찾아내었다고 말하면서 일종의 차별성을 느꼈을 때, 정치철학과 관련된 서적에 탐닉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거나, 그동안 숨겨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숨겨진 디테일에 탐닉하여 생각지도 못한 사실과 지식을 습득하였을 때, 우리는 글을 읽는 기쁨을 느끼거나 만족해한다.
그러나 글쓰기나 책 읽기의 욕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기쁨과 감정적 만족이 있는데, 바로 ‘재미’다. ‘재미’는 누구에게는 취미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삶의 목적일 수도 있다. 단순한 소일거리일 수도 있고, 존재 이유를 담고 있는 소중한 가치일 수도 있다. 심심풀이일 수도 있고, 삶의 강력한 동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글을 쓰거나 읽는 동기일 수도 있다.
쓰고 읽는 욕구의 대상으로서의 소설은 확실히 지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다. 지식과 감정은 화폐와 같아서 통용되고 환전될 수 있는 규범과 규칙 위에 그 가치가 이해되고 강화된다.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어디서 태어났건 상관없이 그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의 굴곡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통용될 수 있고, 심지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깊은 곳에서 교환되고 있을 수 있다. 작가의 감정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된다는 평론가들의 일관된 비평이 그 증거다.
한 번은 서해안을 따라 하늘 높이 날아가던 가창오리 떼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금강호에서 겨울을 나고 먼 시베리아로 날아가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었다.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그 먼 길을 날아가며 가창오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생존의 본능을 따라 날아가는 걸까?
하늘을 나는 가창오리를 보았을 때, 마침 서해안 긴 방파제 위를 자동차로 달리고 있었다. 가창오리만큼은 안 돼도, 꽤 긴 시간을 운전하고 있었기에 지루해졌다. 내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근거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쉴 새 없이 생각이 명멸했음에도 이내 지루해졌다.
라디오를 켰고, 기억나지 않는 음악을 틀었고, 음악으로 인한 청각은 지루함을 잊게 해 주었다. 그리고 지나간 음악은 곧 기억에서 사라졌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감각, 그림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으며 하늘을 나는 가창오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소설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들은 운전하며 듣는 음악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단편을 읽는 것은 일종의 시간을 위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그러나 곧 잊혀질.
“음악을 듣는 시간, 음악을 위한 시간, 여느 저녁처럼 담배를 피우는 시간, 시간을 위한 시간, 음악을 듣는 일이 없었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 헌터 톰슨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