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하지 않는 희망의 전통
오래전, 축구 경기에서 프랑스 대표팀이 패배한 후, 관련 사실을 알리는 프랑스의 유력 스포츠 신문 기사의 제목에는 달랑 '세라비'라는 문구만 인쇄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 문구는 상황에 관한 기대와 결과를 짧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구였다. 세 음절 문장으로 인해 얼핏 감탄사로 느껴지는 이 단어(?)는 ‘그것이 인생이다 (This is the life)’라는 잠언적 의미를 담고 있으나 관용적으로는 예상 밖의 일이나 실망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터지는 감탄사로 쓰인다.
이 관용화된 문구를 굳이 품사 분류에 끼워 맞추어 정의하자면, ‘서사적 감탄사’ 정도가 아닐까?. 때로는 감정 표현(감탄사) 하나가 모든 것(서사)을 설명해 줄 수 있는데, 이것이 감탄사가 가지는 힘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존재한다. 화자와 청자가 표현의 배경에 놓여있는 대부분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고, 동시에 표현의 상황과 언어의 연관성에 모두 공감해야 한다는 조건.
반면, 감정을 서사화하는 과정과 방법에는 하나의 품사가 존재할 수 없다. 상호 경험의 맥락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효과적이고 적절한 말하기와 쓰기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작가이고 클레어 키건은 확실히 탁월한 작가다.
소설에서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를 스토리와 플롯, 그리고 묘사와 암시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면, 클레어 키건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탁월함은 후자, 즉 묘사와 암시에 있는 것 같다. 영국 문학에서 찰스 디킨스의 탁월함이 이야기를 힘 있게 밀고 나가는 힘에 있다며, 클레어 키건의 능력은 느리면서도 섬세한 묘사와 조심스러우면서도 치밀한 암시에서 발휘된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불었다.”
번역가 홍한별은 클레어 키건이 번역에 참고하라고 보내온 편지를 소개했는데, 편지에는 클레어 키건이 소설의 첫 문구를 인용하며 제공한 번역의 해례(解例)가 담겨있다.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암시된 강물에 투신한 여자의 이미지는 소설 말미의 발 벗은 소녀와 연결되면서 완성된다. 홍한별은 작가의 이런 암시 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소설을 최소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암시가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간파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조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클레어 키건의 암시가 가진 특수성을 고려할 때, 다독(多讀)이 소설의 암호 해독기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등 작가가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을 암시했다고 제시한 단어들을 보면서 그 단어들이 가진 추상성과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이는 추상성의 문화적 차이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다. 영국과 아일랜드와 한국의 문화적 추상성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해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은 암시, 또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수긍할 수 없는 암시를 펼쳐 놓고, 독자들이 그것을 간파해 주는 모습을 다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추상적 개념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대상을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이런 작가의 기대는 확실히 비관적이다.
다행히도, 작가의 놀라운 묘사 능력은 암시를 무시하고도 소설이 가진 감정과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묘사에 대한 천재성이 감정과 의미를 서사화하는 탁월함 때문일 것이다. 홍한별은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SNS에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 “번역하면서 이렇게 가슴이 뻐근해지기는 처음임, 이걸 어떻게 잘 옮길 수 있을까”라며 “참 이상한 소설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여기서 ‘이상하다’라는 문구에 주목하게 된다. ’에 견줄만하기 때문이다. 아 문구는 서두에서 ‘서사적 감탄사’로 언급한 ‘세라비’와 같이, 스토리나 플롯에 기인한 것이 아닌, 묘사를 통해 서사를 담은 일종의 감정의 전달 언어와 같았기 때문이다. 클레어 키건이 프랑스어 번역을 앞두고 프랑스 출판사에 보낸 해례본(?)이 소설 자체보다도 더 길었다는 것은 아마도 이를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연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가시 영역으로 수렴되고, 슬픔은 슬픔이라는 거울을 통해 확인된다면 우리가 작가의 소설 속에서 사랑과 슬픔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프리즘과 감정을 반사하는 거울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보편성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비교적 명백하게 제시된 암시가 있다면 그것은 주인공 펄롱이 읽고 있거나 읽을 계획인 책 즉,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은, 이 짧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순한 사건들 뒤로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는데, 그 남겨진 이야기들의 맥락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닿아있다. 위기 속에서의 용기, 슬픔과 따뜻함에 대한 보편성, 이른바 ‘낙관하지 않는 희망’에 대한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낙관하지 않는 희망’이라는 책에서 낙관적 태도를 명랑성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교육자 쇼펜하우어’에서 두 가지 명랑성을 구별한다. 그중 하나는 ‘끔찍한 것들을 비극적으로 대면하는 심성을 분발시키는 명랑성’인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으로서 예시된다. 다른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자각하는 의식을 희생하여 낙천적 기분을 구매하는, 심성에 찍히는 피상적 낙인’ 같은 명랑성이다.”
테리 이글턴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파괴하려는 시도마저 가로막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주장하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예로 든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는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만든 최초의 인간 여자다. 판도라는 상자를 하나 받았고,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열었다. 열린 상자로부터 온갖 죄악과 재앙이 튀어나와 세상에 퍼졌고, 상자의 바닥에는 희망만 남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소설 속 펄롱이 가진 희망이란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희망과 같은 것일 수 있다. 펄롱이 한 명의 어린 미혼모를 구원하는 것에서 찾은 희망이 수녀원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재앙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순진한 낙관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확인된다.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영국의 비평가들은 이 소설 속에서 클레어 키건이 자신의 캐릭터 즉, 펄롱이라는 인물이 직면한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주목했다고 밝히는 한편, 영국 문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함께 존재하는 주제 사이의 균형 즉, 공동체 내 개인의 도덕적 의무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비평은 클레어 키건 자신이 2022년 한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도 상통한다.
“저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우리 마음속에 갇혀 있는 것을 어떻게 안고 살아가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여성 혐오나 가톨릭 아일랜드, 경제적 어려움, 부성 또는 보편적인 것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소녀와 여성이 수감되어 강제로 노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에 대한 관점은 라인홀더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변하지 않은 슬픈 명랑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명랑함은 테리 이글턴이 ‘낙관하지 않는 희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끔찍한 것들을 회피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의 심성을 분발시키는 그런 명랑함이다.
생각해 보면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온 죄악과 재앙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악과 재앙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가 좌절과 패배를 강요하는 현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낙관하지 않는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도덕에 대한 희망의 계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부터, 찰스 디킨스를 거쳐 클리어 키건에까지 이르는 영국 문학의 전통이기도 하다.
“헐벗고 불쌍한 빈민이여, 그대들은 어디에 있거나 이토록 무자비한 폭풍우를 세차게 얻어맞으며 견뎌야 하거늘 편히 쉴 집도 없는 그대들의 머리와 앙상한 팔다리가, 그대들의 굽은 허리와 구멍 숭숭 뚫린 누더기가 어찌 그대들을 이토록 사나운 악천후들로부터 보호해 주겠는가? 오, 나는 여태껏 이 문제를 거의 생각조차 안 해봤노라! 정신 차려라, 호화생활자들이여. 비참한 자들이 느끼는 것을 그대들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들이 소유한 것들의 여분을 빈민에게 나눠줄 수 있을 테니 더욱 공정해진 하늘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제3막, 제4장, 리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