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과 고통
p11 제비야,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다. 세상에 온갖 이야기가 다 있지만 가장 신기한 것은 비참함이란다. 저는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왕자라면 평생을 같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다렸지요. 내 고통도 세상 고통의 하나쯤으로 여겨줄 왕자를요. - [여행, 혹은 여행처럼. 정혜윤 ]-
- 조금 굴곡진 삶을 산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건 아냐, 좀 많이 힘들 뿐이지. 어차피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해도 힘들어. 내 딸만은 예외이길 바라는 거지. - 영화 [ 안녕, 나의 소울 메이트 ] -
글쓰기 폴더에서 이제까지 쓴 글들을 다시 읽어 본다. 글에는 불행했던 과거와 고통스러운 현실의 이야기들 뿐 인 것 같다. 글 속에서 나는 웃으면 안 되고 행복한 순간도 없는 사람일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하루를 열심히 채워 가는 사람이다. 아침 수영을 하고 건강한 식사를 하려고 노력하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정기적으로 장거리를 달리는 사람이다. 거리를 두고 나를 본다면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타고난 밑천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나를 지탱시킬 수 있는 많은 장치를 일상에 배치해 두고, 우울과 절망의 늪에 들어서게 하려는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땅 속으로 꺼질 것 같은 무기력이 찾아오려고 하면 운동복을 갈아입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10km를 천천히 달린다. 폭음과 폭식을 하지 않기 위해, 입에 무언가를 넣지 않으면 도저히 잠들지 않을 것 같은 밤에는 검은콩 현미밥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삼킨다. 그리고 아침 6시 전에 일어나 수영을 간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참 열심히 사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꺼져 버리지 않으려는 나의 안간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
혼자 있으면 끊임없이 불행했던 과거를 복기하고 거기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를 찾는 내가 싫다.
그리고 내가 겪은 불행이, 지금도 부끄럽다.
‘나’이기 때문에 유년기부터 많은 불행이 나를 휘감았다는 생각이 마음 저 밑바닥에 살고 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내 안에서 다른 것을 밀어 내고 커져버리면, 나는 현실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 같다. 제일 불행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책 속에서 내 고통도 세상에 존재하는 아주 미약한 고통이라는, 그렇게 여겨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있을 땐 내 고통이 가장 아프지만, 책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면서 내 고통을 객관화하기 위한 힘을 얻었다. 읽는 행위만으로는 고통을 소화 낼 수 없을 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일기 같은 글에서, 글쓰기 멤버와 공유하는 글, 그리고 브런치에 올리는 글을 쓰게 되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다 나의 잘못 같아서 말하지 못했던 과거와 불행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 글로 인해 내 고통은 세상 속의 존재하는 많은 고통 중의 하나로 희석된다. 이렇게 불행을 이야기하는 고통을 통해서 더 이상 불행 속에 머물지 않으려는 나를 인지한다.
그래, 나는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부정했지만 이제는 인정한다. 나에겐 고통이라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그래서 계속 흔들릴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이제는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적 고통의 감각이, 타인의 고통도 내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나아가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