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까?

다부사 에이코의 < 엄마는 이제 미안하지 않아>를 읽고

by 재나

23살, 그를 만나 연애를 했고 24살에 임신을 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25살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무엇인지, 내 엄마에게 느껴보지도, 묻지도 못한 채, 내 뱃속에서 나온 생명을 마주한 나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엄마였지만 그래도 아이가 좋았다. 내가 없으면 우는 아이를 보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아이와 보내는 시간만으로 24시간이 부족했다.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나를 닮지 않는, 아이 아빠를 속 빼닮은 생김새도 좋았고 아이를 안고 업고 있는 동안 엄마로 존재하는 나도 좋았다.

하지만 24시간 나만 필요로 하던 아이도 커가고 자기만의 놀이로 생각으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다시 나는 나의 자아로 돌아오곤 했다. 본래의 내 자아만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나였기에 엄마로서의 시간으로 내 시간을 더 채우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있었으면 했던 엄마를, 내가 필요한 엄마를 나에게서 만들어 냈다. 아이가 필요하다면(결국 내가 아이가 필요한) 나의 욕망을 포기하더라도 엄마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이래야 된다고, 나도 이런 엄마가 있었으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거라고 나를 향해, 세상을 향해서, 내 아이로 증명하려고 했다. 내 인생은 엄마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다가 아이들 아빠와 별거를 하면서 나의 엄마로서의 삶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전업주부로, 경제력 없는 주부로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었던 밥 차리기를 그만두었다. 집을 나와 딸이랑 둘이 살면서 딸에게 “엄마는 이제 밥하는 게 너무 싫어. 밥으로 정의되던 내가 싫어. 이제 의무감으로 밥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고등학교 딸아이의 아침을 챙겨야 된다는, 엄마가 그 정도는 해야 된다는, 집 밥으로 엄마를 추억하는 한국적 정서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꼭 밥이 아니더라도 빵, 만두, 내가 만든 것이 아니더라도 전날 사놓은 음식으로라도 아침을 챙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로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도 점점 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 나의 하루 중 엄마로서 존재하는 시간은 딸과 아들이랑 전화하는 시간 정도밖에 없다. 온전한 하루가 나를 위해 주어졌다. 내가 이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었던가. 이런 사람이 그동안 엄마로서 어떻게 살았을까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는 딸을 보면 신기하고 반갑고 우린 서로 살기 바쁜 모녀이다. 딸의 하루 일과와 나의 하루 일과를 전화로 공유하고 또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이제 딸에게 그만 미안해도 되지 않을까? 엄마가 되기엔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낳아서 미안했고 임신 기간 동안 많이 울고 불안해해서 아이한테 그런 부분이 많이 전이되었을까 봐 미안했다.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해서, 비싼 분유를 먹이지 못해서, 커 가면서 아이 아빠랑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 줘서, 엄마로서 너무 부족한 내가 엄마라서 미안했다. 자기혐오와 내 안에 상처 받은 어린아이를 가지고 있는 나란 사람이 엄마라서 미안했다. 그냥 나란 인간이 엄마라서 미안했다.


결혼생활 동안 시댁 관계에서 힘이 들고 애들 아빠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었던 시기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나면, 항상 좋은 엄마로 존재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다. 모성애도 없는 나란 인간이 엄마가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난 엄마가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까?


이런 엄마라도 괜찮다고. 혼자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달리고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는 일상이 좋아서, 요즘은 내가 엄마였던가, 내가 모성이란 것이 있던 사람이었나 하고 나를 돌아보는 이런 엄마라도. 주말에 서울에서 내려온 딸이랑 칼국수를 먹으면서 “이젠 너랑 정말 친구 같은 때가 있어”라고 하자 “엄마 나 대학 가고 대하는 거 너무 달라진 거 알아. 진짜 내가 친구 줄 알아?”라고 약간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이런 엄마라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점이고 그 현재가 과거가 되었을 때 선으로 이어지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같은 과거이지만 페미니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는 그었던 선 위에 다른 굵은 선을 긋고 있다. 나를 미워하고 자책했던 과거의 시간 속의 나에서, 그 정도면 되었다고 산다고 애썼다고 나를 다독이는 현재의 나로 변했다. 모든 것이 나 개인의 책임인 것 같은 자책에서 벗어나 남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란 존재로 나를 다시 해석하고 모든 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나를 다독인다.


엄만, 이젠 미안해하지 않을래. 엄만, 다시 내게 주어진 나를 위한 시간을 즐길래.

이젠 그래도 되지 않을까? 늦었을 수도 있지만 엄마의 시간을 엄마를 위한 시간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 이젠 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에 욕심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누군가가 아닌 나를 챙기기 위해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한다. 의무감으로 해야 했던 밥, 그렇게 밥으로 정의되어 버린 나를 나에게서 떠나보내기 위해 나는 나에게 주는 밥도 소홀히 대했다. 이제 혼자 있는 나를 위해 장을 보고 간단한 음식을 한다.


나를 소중히 대하는 연습을 한다.


이제 그만 자책하고 그만 미안해하고 싶다. 내가 욕망하는 것에 당당해지고 싶다. 뻔뻔하다고 하더라고 이젠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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