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 나 자신의 인류학자 되기

by 재나


p121 부끄러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거라는 느낌. (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비채, 2019)




‘1952년 6월 15일,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책은 시작된다. 작가의 유년 시절은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고, 그녀는 아버지가 또다시 어머니를 죽이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로 부모의 삶, 작가가 편입되기 원하는 사립학교 주위 사람들의 계층 밑에 있는 부모의 삶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p40 그 장면을 언어화한다 해도 의미의 부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1952년부터 항상 그래 왔듯, 그것은 광기와 죽음의 장면이었고, 나는 내 삶의 다른 사건들의 고통을 가늠하기 위해 항상 그 장면과 비교했지만, 그와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p41 그 순간 떠오른 불행을 벌다 하는 표현만이 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불행을 벌다 -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의 노르망디 사투리이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의 기원이 처절한 계급의식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나의 부끄러움의 기원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을 숨기는 아이, 4학년 때는 머리에 이가 생기고 위생관리를 못했던 나는 보기에 더러운 아이였을 것이다. 내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빠의 중3 졸업앨범 사진을 보면, 오빠는 졸업 사진을 찍는 날인데도 세수도, 머리도 감지 않은 모습으로 찍혀 있다.

5학년 때, 작은 고모 옆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나는 나를 공부 좀 하는 아이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창 시절 내내, 공부 좀 하는 아이로 살았다. 중학교 때까지 아빠, 오빠와 단칸방에 살았지만 학교에서는 절대 표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엄마가 없는 것도. 부끄러웠다.


중학교 때 학교를 오갈 때 같이 다니던 친구의 아빠는 변호사였다. 그 애의 집은 이층 양옥집이었고 나는 단칸방에 살았다. 그런 나를 노출하는 것도 부끄러움이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올 때, 그 애와 같이 타고 왔던 기사가 딸린 자가용, 같이 가자고 했던 나에게 고액이었던 학원, 그 애와 같이 처음 먹었던 피자, 그런 경험들이 나에겐 다 부끄러움이었다.


아빠는 부끄럽지 않은 내 성적표 앞에서도 부모 란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잘 받아보았습니다’라고 쓰라고 짜증스럽게 말하던 나. 그런 아빠도 부끄러움이었다. 어쩌면 아빠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에게 부끄러움이었다.


식습관도 내 부끄러움의 하나이다. 허겁지겁 먹는 나.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야 되겠다는, 챙겨놓아야 되겠다는, DNA에 새겨진 것 같은 나의 식습관. 음식의 기호, 맛의 유무도 상관없이 배를 채우려 먹을 때가 있고, 타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나면 부끄럽다.



유년기에 하루 종일 굶다가 오빠와 끓여 먹었던 짜장라면 5개, 둘이서 5개를 허겁지겁 먹었다. 중, 고등학교 때, 토요일 학교를 마치고 일주일치 빨래를 하고 나서 허겁지겁 먹던 라면. 아직도 나에겐 그런 모습이 남아서 혼자 있을 땐 더 심해진다. 어느 날은, 이렇게 먹는 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는다면 얼마나 추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딸과 밥을 먹다가 자주 들었던 말, “엄마 화났어. 왜 밥을 그렇게 먹어” 음식을 천천히 즐기면서 먹는 것도 나에겐 노력이 필요한 행위이다.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 품위 있어 보이고 싶지만 실생활에선 존재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구차함에 수치스러움을 감지하는 순간이 있다. 무의식과 경험에서 올라오는.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경험한 폭력도 나에겐 부끄러움이었다.

그가 나를 때리기 시작했고 순간 두려움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딸을 소리쳐 불렀다. 어린 딸이 왔고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후에 계속 자책했다. 그도 그 순간에 딸의 이름을 부른 나를 모성도 없는 엄마처럼 비난했고 그보다 나 자신이 나를 더 비난했다. 자식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엄마란 작자가 자기 죽겠다고 어린 딸을 찾다니.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전남편의 폭력 앞에서도 그런 폭력을 야기한 것이 나의 잘못인 것 같은 부끄러움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날은 그냥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 내 존재가 부끄러운 날. 부끄러움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