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신유진 옮김, 1984BO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조르주 바타유-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유방암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쯤, 만나기 시작하여 1년 정도 연인 관계로 지내던 마크 마리와, 섹스 후 흐트러진 옷과 신발을 찍은 사진을 두고 서로 글을 쓰고, 책으로 낸 것이다.
자신들의 사적인 사진을 공개하고 그것에 대한 사유의 글을 공개한 작가들이 대단한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글쓰기가 아니면 거짓말 같아서 쓸 수 없다던 아니 에르노, 그래서 많은 비난을 감수하고 글을 쓰는 작가.
글을 쓰면서 존재 개방의 수위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이런 글을 타인이 봐도 될까? 이 글이 나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타인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읽고 있다. 물론 프랑스와 한국은 다르지만. 아니 에르노가 자기 노출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쯤의 프랑스와, 한참 페미니즘 책들과 사고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은 좀 가깝지 않을까 해서이다.
p71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은 매번 다른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남자 없이 지내기 힘든 것은 단지 성적인 필요성보다는 지식을 향한 욕망에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인가.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어떤 깨달음을 위해 M(마크 마리)을 만난 것인지 알지 못한다.
p80 그러니까 30년 전, 한 사춘기 소녀가 춤을 추던 곳에서 우리는 나체로 잠을 잤다. 흩어져 있는 옷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모르고, 놀다가 아무 데서나 잠든 새끼 고양이들처럼. 내가 버리려 하지 않는 모든 믿음 중에 이것이 있다. 집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왜 아니겠는가. 르몽드지의 한 기사에 따르면 유전학자들은 여성들의 자궁이, 출산과 낙태에 상관없이, 그곳에서 만들어진 모든 아이들의 흔적을 보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p82 나는 내가 사진에 매료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물질적인, 유기적인 얼룩. 글을 쓸 때 역시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나는 단어들이 떼어내지 못하는 얼룩이기를 바란다.
얼룩은 지우려 해도 그 흔적을 남긴다. 글은 흔적이다. 단어들은 떼어내지 못하는 얼룩이기를 작가는 바란다. 글은 나를 드러내는 욕구이다. 부끄럽지만 부끄러움보다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더 클 때, 글로 쓰게 된다. 글은 행위의 완결이다. 미완의 행위로 남은 것들에 해석을 불어넣고 글로서 표현될 때 완결된다. 때론 잘못된, 거짓의 완결이 될 수도 있다. 진실로 바뀔 수도 영원이 거짓으로 남을 수도.
p114 내게 글쓰기란 모든 감각의 정지 상태다. 다만 그것을 탄생시키고, 일으킬 뿐이다.
p126 이제 나는 과학적, 철학적, 예술적인 모든 연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무(無)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임을, 그리고 무(無)의 그림자가 어떤 형태로든 글을 따라 배회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무용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내 안과 주위를 흐르는 무(無)의 그림자. 그림자를 따라서 생각하고 느끼고 글을 쓰지만 무(無)의 실체에는 다가설 수 없는 것. 실체를 알려고 욕심내지 않고 그림자에 근처에 머무르고 계속 이런 글이라도 써 내려가는 것. 그것이 존재하는 것.
p178 그것(사진의 용도)은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유한한 운명을 지닌 모든 것들의 가능성이라고. 하나의 순간에 갇혀 버린 상이 언젠가 점과 선의 연속으로 이뤄진 시간을 탈출하여 무한히 팽창해 나가는 꿈을 꾸게 만드는 희망이라고. ( 역자 후기 중 )
p178 ‘그러나 삶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적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가 없으며, 형태도 없다.’- '삶을 쓰다'(아니 에르노) 서문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