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0 기쁨을 나누는 일은 배우지 않아도 사는 데 무리가 없지만, 슬픔을 나누는 일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강석경 씨를 만나면서 알았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사진, 돌베개, 2019)
p21 자기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힘들면 회사는 가지 않아도 된다. 나를 지키는 게 먼저다.
p116 사회적 약자가 불미한 사고로 죽었다. 팩트는 기계 안에서 죽은 거예요. 문제는 이게 인식되지 않는 폭력이란 거예요. 인식하지 못하는 폭력이 폭력이란 걸 드러내야 해요.
p118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일상적인 폭력 안에 놓여 있어요. 일상적인 폭력이 수많은 종류로 뻗어 있어서 온갖 죽음으로 발현되고 외로움으로 발현돼요. 우리가 얼마나 무뎌져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이게 이 사건의 본질 중 하나예요.
중학교 때 친구 Y는 상업고등학교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3남매의 맏이였던 Y는 공부를 잘해서 당연히 인문계고로 진학할 줄 알았는데 지역에서 가장 좋은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의 준말)으로 진학했다. 나는 아빠가 여상 가라는 말에 발끈해서 며칠간 아빠와의 다툼 끝에 인문계고로 진학할 수 있었다. 가정환경으로 비교하면 내가 더 나쁜 상황이었지만 자식에게 항상 져주던 아빠 덕분에 난 인문계고로 진학했고 고등학교 생활 이후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안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지도 않았다. 독서실에서 가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Y는 여상으로 진학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피자집이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야무지게 일을 하는 Y는 어디서든 인정받았다. Y는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취업했고 IMF 이후 건설회사의 부도로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리고 Y는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막내 동생 학비도 대고 그러다 결혼을 했다. 중학교 때까지 단짝이던, 유일하게 우리 집에 불렸던 Y와 나는, 고등학교 이후에 삶이 많이 달라졌다.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으면서 Y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친오빠 생각도 났다. 중학교 1학년 때 엄마가 집을 나가고 환경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오빠는 학교에도 공부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학교도 간신히 가고 시험도 간신히 쳤다. 그러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지역에서 소위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가는 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진학했다. 물론 지금은 고등학교 전공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오빠도 고등학교 생활 동안 식당 설거지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받은 돈으로 맛있는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름, 학교라는 단체 안에서 보호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학교에서 말 잘 들고 소위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 심화반 속한 나는, 선생님이 따로 수업을 하고 관리도 하고 방학 때, 자율학습도 심화반 아이들끼리 같이 했다. 그 안에서, 나름 나의 정체성을 세우고 보호받았다. 대학에 가서는 교육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좀 더 쉽게 모두에게 용인될 수 있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남편의 직업 때문에, 지금은 명문대에 진학한 딸 덕분에 용인되는 부분들이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다수의 청소년들이 노동현장에 있다. 나는 내 아이가 아니라서, 내 아이가 그 현장에 있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고 그 애들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현장에 있는 청소들에게 공부할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사회가 방치하는 사이 아이는 그렇게 노동 시장에서 자본주의 시장원리 안에서 소모되고 있음을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생각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청소년이 자신의 의지로 노동현장에 있음을. 노동의 정당한 대가로 돈을 벌고 있음을. 청소년의 노동과 성인의 노동을 다른 판단기준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의심해 보지 않았다. 불편하고 아픈 현실은 외면하려고 했다.
나 또한 청소년 노동 현장에 있을 수 있었는데, 내 아이도 그곳에 있을 수 있었는데.
누나가 아닌 여동생이어서 가정의 풍파를 좀 덜 겪어낼 수 있었고, 자식에게 약한 아빠 덕분에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어떤 우연들이 내 삶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노력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었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제야 이런 생각과 의심을 한다.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