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살, 다시 돈을 벌다.
p45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고 자책하던 사람이었다. 그냥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 나에게는 지배계급이 만들어놓은 담론에 속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었던 것처럼 자기 삶 속에서 은폐된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진짜 시작이다. < 발췌 - 을의 철학 , 송수진 지음, 한빛비즈, 2019>
41살, 유아 영어 파견강사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5년 전에, 방문 영어교사를 1년 정도 했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땐, 아빠의 생활비를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부업 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별거를 시작하고 내가 얼마를 벌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4시까지는 파견 영어교사로, 그 이후로는 학습지 영어교사로 집을 방문했고 토요일에는 유아영어센터에서 수업을 했다.
유아영어 파견강사는 일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수업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우선 교구재가 많이 필요했다. 코팅 자료에서 펠트로 만든 교구까지, 유아들을 집중시키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집을 나와서, 마음 둘 곳도, 타지라서 아는 사람도 없던 나는 교구 만들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팟캐스트 책 낭독을 들으면서 교구를 만들고 11시 30분에 자율학습을 마치는 딸을 태우러 갔다. 딸에게 만든 교구를 보여주면서 수다를 떨다 자고 아침에 딸을 8시 20분까지 등교시키고 출근해서 수업하고 교구 만들고,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토요일에는 6시에 마치는 딸을 하교시키고 배달음식을 먹으면서 맥주 한 잔 하고 잠이 들었다. 일요일에는 아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보냈다.
모든 일은 생각과는, 상상과는 다른 것이다. 유아 영어 파견 강사일은 유아들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이 보는 앞에서 수업을 하는 것이다. 3월에 수업을 시작하면 수업시간 30분 내내 우는 유아들, 계속 돌아다니는 유아들. 그냥 전쟁터이다. 그리고 어떤 원에서는 너무 정적이라고. 어떤 원에서는 너무 활동적이라고 강사 교체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피드백을 받은 날은, ‘이 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끙끙 앓았다.
이동 동선을 길고 이동 시간은 짧아서 목숨을 걸고 운전을 했다. '이 좌회전을 받지 못하면 수업 시간에 늦는다.' 그런 마음으로. 원이 위치한 환경에 따라 주차도 힘들었다. 어떤 날은 주차할 공간을 찾다 찾다 차를 버리고 싶은 날도 많았다. ‘남의 돈 먹기는 쉽지 않으니, 그래 돈을 버는 것이 이런 것이겠지.’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래도 일 할 수 있어서. 객관적으로 마흔한 살에, 경력도 없는 내가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일의 힘듬보다 더 힘든 것은 인간관계, 그들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장이 영업을 가서 원장에게 들은 말은 교육부장이 전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 그런 중간에 잘못 전달된 말들을 참지 못해서 같이 시작한 선생님들이 중간에 일을 그만 두기도 했다.
일에 대해 몰랐던 1년 차 때보다, 2년 차 때는 정말 힘들었다. 수업도 적었고 이동 동선은 엉망이었다. 그만두라는 것 같았다. 3년 정도 경력이 있어야 이직도 가능할 텐데 경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참았다. 나의 특히 참기. 절박했다.
거기에 방송대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출석 수업은 한 번도 가지 못했고 대체 시험과 리포트, 기말고사로 졸업했다. 딸과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시험 전엔 일 마치고 바로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했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한 달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들었고 피부는 건조해서 갈라지고 안구 건조증으로 눈에는 통증이 왔다.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도 운동할 시간도 없었다. 고2였던 딸과 같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먹기는 해야 되니깐 주말이면 뭐 맛있는 거 먹을까 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살았다. 살아냈다.
살아남아야 된다는 절박함에 사람이 들어올 틈은 없었다.
언니처럼 나를 따르던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생활해서 영어는 네이티브 수준이고 교구도 수업도 잘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도 부정적 피드백을 듣고 나면 많이 힘들어했고 나에게 전화로 하소연했다. 부장과 사장에 대한 하소연. 한참 방문수업을 하는 중, 이동하는 차에서 전화를 받았다. 내 살기가 팍팍하니 공감도 위로도 점점 하기 힘들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선생님은 이 일 그만두어도 남편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영어도 잘하니 다른 일도 시작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 나는 부장, 사장이 부당하더라도 견딜 수밖에 없다’ 차츰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로 하소연하지 않았고 그 해가 지나고 일을 그만두었다. 약육강식. 오늘 내가 나가던 원에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다음 주는 다른 선생님이 수업에 가야 했다. 지금이야, 나랑 스타일이 맞지 않구나. 이젠 눈치 안 보고 수업할 배짱이라도 생겼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리면 안 된다는 절박함만 있었다. 아직도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다음 해에 교육부장님이 바뀌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 사람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느낀 한 해였다. 당당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교육부장님이 멋지고 존경스러웠지만 별거를 하고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내 상황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힘들었다.
p53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야근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면 이직을 고민하자. 생계 때문이라면 소비를 줄여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하다. 다시 자기만의 생산수단을 확보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딸이 고3 때는, 방송대도 졸업하고 유치원에 주 4회 수업하는 스케줄로 바뀌고 방문수업 일도 좀 줄여 나갔다. 수입은 줄었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다가는 교통사고를 내거나 병에 걸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돈으로 품위 있게 사는 삶에 대해서 꿈꾸게 되었다. 책 읽기야 습관이 되어 있고 남이 보기엔 과하다 싶게 집착하는 일이었고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 달리기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기까지 이르렀다.
p195 철학이 진짜 무서울 때가 있다. 바로 절대 고독의 길을 홀로 걸으라고 할 때다. 자꾸 자유를 원한다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나에게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넘어선 자리에서 홀로 일어서라 하고,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무언가에 기대지도 말고 스스로 과거와 단절하라고 한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을 맹신하는 대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우연한 마주침 속 불안을 가슴에 담은 채 살아가라고 한다.
나를 잘 소비하는 것이 유능한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 목소리를 내면 내 자리를 잃게 된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나를 끼워 맞추어서 살아남아야 된다고 나를 채찍질 했다. 그런 것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직 잘 모르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디에 쓰고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