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 슬픔이 자신의 이름 같았던 소녀
영화 [연인]의 제인 마치가 강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 남자 펠트 모자, 가녀린 몸에 커다란 슬리브리스 원피스, 벨트, 반짝이는 하이힐. 1992년 개봉되었을 때, 청소년 불가 영화라서 보지 못했고 그 이후로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령 베트남을 배경으로 15살 프랑스 소녀와 나이 많은 중국 남자의 정사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팟캐스트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대한 책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소재로 해서, 글을 쓰는 아니 에르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도리스 레싱과 같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는 요즘, 뒤라스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 먼저 가장 유명한 소설 [연인]을 먼저 읽어 보고 싶었다.
짧은 소설이고 흡입력이 있어 금방 읽혔다.
그리고 안다고 생각한 내용이랑 완전히 달랐다. 소설 [연인]은 15살 소녀와 나이 많은 남자의 외설적인 정사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에 대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절망 가득한 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프랑스인이지만 베트남에서 태어난 소녀, 그리고 그녀의 엄마와 오빠들.
그녀의 엄마는 결혼해서 베트남으로 남편을 따라 오지만 그녀의 남편은 병에 걸려서 프랑스로 돌아가고 그녀는 자식들과 베트남에서 곤궁하게 살아간다. 엄마는 큰아들을 편애하고 작은 아들은 심리적으로 병들게 하고 딸 또한 외롭게 한다. 연인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 그렇게라도 존재를 인정받고 살려고 한 소녀의 이야기였다. 그런 가족에게서 떠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녀의 이야기.
결국 병든 관계 속에 있던 가족에게서 떠나는 소녀의 힘은 자신을 사랑해 준 중국 남자에서 온 것일까? 어떤 상황도 바꿀 수 없는 ‘두려움을 사랑할 힘이 없는’ 그런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기대하지 않아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면서, 거기에서 힘을 얻은 것일까?
금기에 대한 사랑, 나이 많은 중국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작은 오빠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소녀에게 덜 금기시되는 것일까?
중국 남자를 만나는 것을 알고 그가 준 돈을 받고, 기숙사에 가서 그녀를 자유롭게 하라는, 통제하지 말라고 기숙사 사감에게 말하는 엄마. 잘하는 프랑스 과목이 아니라 못하는 수학 점수만을 보고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슬픔과 불행이 전해진 소녀가 소설에 있었다.
p57 어머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신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고함을 친다는 걸 그에게 말해 준다.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2007, 이하생략)
p69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삶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서 그런 절망감을 딸에게 그대로 전이하고 그런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큰아들에게만 매달렸던 엄마. 딸의 어떤 면을 시샘하던 엄마. 딸의 그런 면이 언젠가는 가족을 살릴 돈이 되리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엄마가 소설에 있었다.
엄마와 딸을 어떤 관계일까?
모성신화에 기초한 엄마 역할에 충실한 엄마. 그런데 그 모성신화는 아들에게만 해당될 때가 많다. 자식에 대한 희생은 아들에게 국한되고 딸은 같이 모성신화를 수행해야 하는 여자일 뿐이다.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딸을 시샘하는 엄마, 권여선의 <이모>에서 도박하는 아들을 위해 큰딸의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 <연인>에서 큰오빠만을 사랑하고, 평생 돈을 벌어 큰오빠의 사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엄마.
엄마란 어떤 사람이어야 했던 걸까?
그리고 <연인>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여인, 작가의 이야기다.
p15 마구 뒤섞인 일들을 모두 내가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한 것도,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닌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또한 뒤섞인 일들이 모두 매번 그 본질을 규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에 흡수되어 버리는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과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p27 그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에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p123 나는 책을 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순간 너머로, 끝없는 사막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머지 나의 생의 범위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소설 [연인]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반성한다. 안다고 착각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사랑]이 그랬고 [연인]이 그랬다. 통속적으로 소개된 내용만 보고 안다고 착각하고 읽지 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것을 읽었을 때 보이는,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안다고 착각하는 건 영원이 모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