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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 Sep 02. 2022

다른 이의 삶에서 나를 본다.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1953년생 이순자님의 글을 읽으면, 1976년생인 내가 살아왔던 순간순간이 겹쳐진다.


순자님이 베이비시터 일을 하던 이야기에서, 작년 가을, 베이비시터 일을 하던 내가 떠올랐다.


 노무사 2차 시험을 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당연히 불합격을 예상했다. 다시 1년을 공부하기 위해서 합격발표 때까지 여유롭게 보내보기로 했다. 유아영어센터에서 일은 힘들게 주 2회 수업으로 줄여둔 상태에서, 다시 수업일수를 늘리기에도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맘 시터 앱에 가입해서 베이비시터 일을 해보기로 했다. 맘 시터 앱에 가입하고 자기소개서,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를 등록해서 인증을 받았다.

인증 후, 자기소개글을 올리고 희망시급을 적었다. 나는 강남서초유아영어센터에서 근무하는 강사로서 보통의 시급보다는 높은 15,000원으로 적었다.

 올리고 얼마 안 있어서 메시지가 왔다.


  처음으로 방문한 집은, 8개월짜리 남자아기의 집이었다. 엄마는 병원 정기검진을 갔고, 재택근무 중인 아빠가 혼자 돌보기 힘들어서 신청했다고 하셨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발달이 빠르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남자아기였다. 8개월 된 아이는 돌에 12kg까지 몸무게가 나가던 아들 같았다. 이뻤고 순했다. 거실에 있는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영어동요, 한글 동요를 불러주고 업어주면서 아기를 돌보았다. 생후 1년 미만의 아기를 돌보는 것이 오랜만이어서 조심스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예쁜 아기였다.


4시간의 베이비시터 일을 마치고 시터비를 입금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아기를 안으면서 용을 썼던지 어깨가 아팠고, 어깨를 주무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딸이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두 번째 방문한 집은, 20개월이 안 된 천사 같은 여자아이 집이었다.

 시어머니는 첫아이를 키우면서 임신한 며느리를 위해서 주말에 베이비시터를 신청한 것이다.


서울 길이 아직 낯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반포의 어느 아파트를 찾아갔다. 아직 말을 못 하지만,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한 예쁜 여자 아이와 아직 앳돼 보이는 아이 엄마가 나를 맞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집안에 맴돌았지만, 나는 유아 영어 강사답게 아이에게 영어동요를 불러주면서 같이 놀기 시작했다. 간식을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자 시어른 부부가 오셨다. 요즘 어른답게, 손주는 보고 싶은데, 부담이 될까 봐 조심하는 분들 같았다. 그리고 잠시 병원에 갔던 아이 아빠도 와서 집안이 가득 찼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이 아빠는 근처 병원에서 수련 중인 레지던트였다.


 이런 상황이라니. 예전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딸아이가 4살 때, 나는 둘째를 임신했고 아이들 아빠는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인 레지던트였다.


 시어른은 손녀가 보고 싶어서 주말마다 오셨고 나는 주말마다 반복되는 일정에 내색을 못했지만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꿈꾸었고 당연히 그렇게 살아내리라고 생각했고 다짐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전문직 남편을 가진 여자,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다시 싱글이 되어 낯선 서울길을 찾아다니는, 이런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4시간의 베이비시터 일을 마치고 일당 6만 원에서 만원을 더한 7만 원을 받았다. 아 아빠가 사 온 녹말 펄이 들어간 음료를 하나 받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음료를 먹고 싶지 않았지만 버리기도 마땅치 않아서 한 모금 쭉 빨아들이는데 녹말 펄이 목을 가득 채우면 넘어가지 않았다.


넘어가지 않는 녹말펄처럼, 나는 현실을 넘기기 못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냥 더 참았다면, 더 지혜로웠다면 나 또한 아직도 누구의 아내로 살고 있지 않았을까?


자책과 신세한탄이 내 마음 밑에서 올라오려고 했다.  


눈물을 참고, 배에 힘을 주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7만 원을 받아 들고,


그래 내 삶이 초라해 보이더라도 나까지 나를 비참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러지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같은 집에서 한 번 더 베이비시터 일을 하고 베이비시터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노무사 합격소식을 접했고 지금의 나는 1년 전의 나보다 단단해지고 있다.



 얼마 전,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때 임신하고 있던 아이의 엄마였다.


“아직도 베이비시터 일을 하시는지, 그때 아이랑 영어로 잘 놀아주셔서 생각나서 다시 연락드린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지였다. 


나는 답장으로


“연락 주셔서 감사하지만

더 이상 베이비시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는 내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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