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은 특별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곳에 다시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은 향수나 그리움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을 수 있는 무엇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까.
어린 시절의 집을 아직도 찾아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서울에서 행운일 수 있다. 지난여름 나는 우연히 내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사실 몇 년 전에도 또 그 보다 한 10여 년 전에도 그곳에 가보았다. 내가 살았던 곳은 1970년대-80년대 주택가였으나, 이후 1990년대부터 점차 음식점 거리로 바뀌었다. 내가 살았던 집도 한동안 음식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갔을 때는 달랐다. 이전 음식점이 폐업을 하고 나간 후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새롭게 공사를 하려고 하는지 그동안 몇 차례 리모델링한 부분을 제거한, 그래서 내가 살던 시절의 원래의 집의 벽과 구조가 드러난 상태였다.
원래는 차를 타고 지나면서 창밖으로 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내가 살던 시절의 집의 모습이 드러난, 그 낡은 폐허 같은 건물 앞에서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마당이 있던 곳을 지나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까지 갔고, 옆집, 뒷집과의 사이의 좁은 통로를 들여다봤다. 어린 시절 속상할 때마다 내가 숨어 들어가 울던 곳이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오래된 돌벽을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댔다. 차갑고 까칠한 돌의 감촉이 긴 시간을 순식간에 뛰어넘는 것만 같은 그 순간, 누군가 큰 목소리로 거기 누굽니까! 들어가면 안 돼요, 나와요, 차도 여기다 세우면 안 됩니다. 빨리 차 빼세요! 하고 소리쳤다. 당황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짧은 순간 사진 몇 장을 찍어놓았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얼른 그곳을 떠났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얼굴 앞에서>라는 영화 속에는, 미국에서 살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상옥(이혜영 분)이 감독과의 점심 약속이 늦춰지자 남은 시간을 이용해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조심스레 들어가서 작은 마당을 살펴보던 상옥은 현재의 집주인과 마주하고, 집주인의 배려로 집안으로까지 들어가 보게 된다. 개조를 했다니 분명 예전의 집과는 다를 것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집구석구석에서 옛날의 시간을 본다. 상옥이 마주하는 여자아이는 집주인의 딸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천에 사냐는 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 했지만 이후,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라는 말을 거듭 되풀이하는 아이는, 어린 시절의 상옥이기도 할 것이다. 그 아이를 꼭 안아주는 상옥의 모습은 공간이, 집이라는 사물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켜 주고, 화해시켜 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 몸이 존재했던 공간, 내가 움직이고 다녔던 공간과 그 공간을 채웠던 물질들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후에도, 나를 그 이전과 연결시켜준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나를 잃어버린 순간에도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러한 공간들, 그리고 공간들 속의 사물들이다.
영화 속의 상옥처럼 나는 서울의 어떤 공간도 차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세상과의 어떤 연결됨을 느끼는 공간이 서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미친 듯이 폭주하는 자본의 열망 덩어리인 '집과 '땅'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한없는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또 그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거주하는 곳, 내가 움직이고 지나가는 공간, 나의 몸과 닿았던 벽과 바닥들만이 나를, 나의 몸과 시간과 기억을 이 세계에 붙들어주는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