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존재, 부재하는 자는 내 기억이 시작되는 나의 어린시절부터 나와 함께였다.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한번도 내 기억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존재, ‘부재’의 의미를 처음 알려준 사람, 아버지. 그러나 그가 쓰던 몇몇 물건들은 여전히 그의 방에 있었다. 전기 면도기와 진주 커프스 단추 한 쌍.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후에도 그의 손이 닿은 물건은 남아서 그와 다른 사람을 이어 줄 수 있다는 나의 첫번째 깨달음은 아마도 그 두 물건으로 부터 왔을 것이다. 물론 어린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단지 ‘아버지 방’이라 불리웠던, 책장과 ‘전축’이 있고 ‘에어콘’ 있고, 그리고 밤에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던 그 방의 책장 유리문 안에 언제나 놓여있던 아버지의 물건의 냄새를 맡으며,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려 보려 애쓰던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아버지라는 내 기억 속에 부재하는 자는 내게 언제나 어떤 ‘물건’을 통해서만 연결될 수 있었다. 그 방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에는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들과 젯상이 쌓여있었다. 제사 때만 들어가는 그 방 속에 있던 물건들 – 나무로 만든, 긴 다리를 지닌 젯상- 엄마말로는 너무 급하게 주문을 하는 바람에 나무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져서 다리가 휘고 잘 맞지 않는다고 내내 뭐라 하시던- , 그 위에 올리는 또 다른 작은 의자 같은 것- 이것이 원래 ‘신주’를 올리는 의자, ‘교의交椅’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향로, 각종 제기, 돗자리, 그리고 병풍은 어린 내게 약간은 무섭고 꺼려지는 물건들이었지만, 또 부재하는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물건들 중 하나였다.
일년의 몇번, 차례와 제사 때 마다 그 물건들은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옮겨져 어떤 순서에 따라 놓여졌고, 상 위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이며, 향이 피워졌다. 엄마는 현관문을 조금 열어놓았으며, 그 작은 의자 같이 생긴 것 위에 알수 없는 한자가 잔뜩 쓰인 종이를 붙였다. 큰 오빠부터 차례대로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밥그릇에 숫가락을 수직으로 꽂아놓고 조금 있다가는 국 위에 숫가락을 놓고, 또 몇몇 음식 위에 젓가락을 놓는 일들이 반복되고 나면 모든 것은 다시 다 치워졌고, 우리는 둘러 앉아 거기에 놓인 음식들을 먹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혼이 정말로 와서 그 음식을 먹고 간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음식을 한 입이라도 먹어야지만 뭔가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연결될 수 있다는 그런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은 있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제사와 차례 문화는 가부장제 문화의 대표적인 폐해로 인식된다. 물론 그 시절의 나에게도 왜 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엄마는 하루종일 제사를 준비하기만 하고 정작 그 의례가 이뤄지는 동안에는 옆에 서 있기만 하는지, 제사를 준비하는 일들은 왜 오로지 여자들의 몫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궁금증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 최소한 제사는 그리고 그 제사에 동원되는 물건 하나 하나, 음식 하나 하나들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아니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확인해주는 것들이었다.
제사의 끝무렵 그 이상한 한자가 잔뜩 적힌 종이 – ‘지방’이 태워지고 나면, 짧은 비일상적인 순간, 부재하는 자와의 가냘픈 접촉이 끝났다는 것을, 이제 다시 아버지가 없는, 그의 존재를 더이상 환기할 수도 없고, 굳이 그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것을 의미했다. 글씨와 종이가 한 순간만이라도 아버지라는 부재하는 자와의 연결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논리라 생각되었지만,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린 내게 힘든 일이었고 아무도 또 내게 이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왠지 보이지 않는, 내 옆에 없는 아버지를 순간이나마 이 세상에 있는 것 처럼 만들어줄 수 있는 마법이 그 태워지는 종이 속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의 제사와 차례는 점차 간소해졌다. 다리가 휘어서 언제나 문제였던 그 크고 높은 젯상, 작은 의자같은 물건, 알 수없는 한자가 잔뜩 쓰인 병풍, 그리고 낡은 제기들은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모두 처분되었고, 낮은 평범한 평상과 작은 병풍, 그리고 몇개의 제기만 남게 되었다. 아울러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지방’은 사라졌고, 낮은 젯상 위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올라갔다. 사진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재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이 이전의 종이, ‘지방’보다 덜 신비로운 연결감을 주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지방’은 유교제사에서 사용되는 ‘신주’의 대체물이다. ‘신주’는 “나무에 신이나 죽은 사람의 신분, 관직, 명호, 친속 관계, 봉사자 등을 기록한 패”를 의미한다. 뽕나무나 밤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정형화 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36-36쪽) 이렇게 만들어진 신주는 죽은 자의 영을 ‘표상’하는 물질이지만, 규정에 따라 제작된 “정형화”된 모습을 지닌 "물건"일 뿐 실제의 사람과는 ‘형상적으로’ 전혀 닮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신주가 사용되기 전에는 ‘시동’이라 불리는, 죽은 자와 혈연관계에 있는 후손, 주로 손자가 제사를 받는 망자를 대신했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의 옷을 입고 마치 죽은 자가 돌아온 것처럼 제사 음식과 술을 받아먹는 장면은 마치 그에게 죽은 자의 영이 빙의된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진 , 한대 이후 제사에서 ‘시동’이 사라진 후 한 때는 죽은 자의 모습을 그린 소상, 화상이 제사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은 죽은 자의 모습을 닯은 재현물, 형상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진과 유사하다. 그러나 송대부터 유학자들은 이러한 닮은 형상을 거부하고, 정형화된 나무패에 글씨를 새긴 신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이상의 내용은 위의 이 욱의 책, 36-40쪽 내용에서 참고). 그리고 신주를 사용할 수 없는 제사에 사용된 것이 종이에 써서 임시로 만든 신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지방’이었다.
여기서 신주의 역사를 논의하며 형상을 배재한 비형상적 물질이 오히려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한 감각을 복원” 시켜주었고, “신의 육체적 모습을 감추어버림으로써 신과 인간이 영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분석한 윗글의 통찰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위의 책 40쪽)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보다 아버지의 제사에 사용된 물건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태워지던 지방에서 내가 죽은 아버지와의 어떤 연결점을 더 강하게 느껴다는 것은 이러한 논리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형상적 이미지, ‘닮은 이미지’가 기억을 소환하고 부재하는 자를 이곳에 불러내는 낼 수 있다는 믿음은 꽤 오래전부터 여러 지역에 퍼져있었다. 그런 점에서 초창기 사진을 둘러싼 여러가지 유령 담론들의 유행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닮은 이미지’는 ‘그 어떤 무엇과 닮은 것’이고 그 무엇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을 때 더 효과적으로 이미지의 힘을 행사한다. 따라서 무엇을 닮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존재를 감각하고자 할 때는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전 위-디오니시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것들에게는 비슷하지 않는 형상들을 통한 표현을 적용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 그들을 실제의 상태와 완전히 상이한 형상들로 묘사함으로서 경의를 표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우리와는 달리 물질성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천상의 위계> 제 2장 중)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아버지의 사진보다 아버지의 제사에 사용되던 물건들과 낯선 글씨가 적힌 종이에 더 신비감 혹은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꼈던 것은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그저 모호한 아득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지 ‘그리움’도, 그의 부재로 인한 ‘결핍’과 그로 인한 ‘슬픔’과 ‘허전함’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제사라는 의례 – 그를 기억하고 그와 일종의 만남을 갖는 것이 허용된 그 유일한 시공간 속에 함께했던 물건들은 그 어떤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와 부재를 강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최소한 나에게 죽음과 부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기억도 사진도 아닌, 그의 손이 닿았던 물건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의례에 사용된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사물-힘(thing-power)에 대한 나의 관심의 근원도 아마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