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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ul 22. 2020

책은 냄새로 유혹한다

책 냄새가 코 끝에 닿을 때

나는 책 냄새가 좋다. 엄지손가락을 종이에 대고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후루룩 넘기면 바람을 타고 냄새가 얼굴로 번진다. 추운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가, 따듯한 봄의 햇살을 처음 맞는 기분이랄까. 손발이 찌릿하고, 심장이 몽실 댄다. 그래서 책방이 좋았다. 책 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으니까.

어릴 때 동네에 조그만 책방이 있었다. 한 20평 남짓 되려나. 시장 앞 오래된 건물 지하였는데, 책 밑 ‘ㄱ’ 자가 빠진 낡은 간판이 세월을 말해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혼자 책방 가는 취미가 생겼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열심히 모아 한걸음에 책방으로 달려갔다. 책방 주인아저씨는 반쯤 벗어진 머리에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손님이 와도 고개만 까닥거릴 정도로 친절과는 거리 멀었다. 가끔 책을 물어보는 손님한테 ‘저기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하는 모습에서 쌀쌀함마저 느껴졌다. 오히려 좋았다. 몇 시간이고 책 구경해도 뭐라고 안 하니. 늘 계산대 앞, 철제의자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며 신문을 읽고 계셨다.


책 고르는 나만의 방법도 있었다. 일단 책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눈으로 훑어본다. 그런 뒤 제목이 당기는 책을 꺼낸다. 그리고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한다. 나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시작이 무척 중요하다. 대략 5페이지 정도 읽으면 살지 말지 결정된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나만의 느낌이었다.


그 당시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코넌 도일, 에드거 앨런 포 등 지금도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특히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제일 좋아했다. 지금은 어느 출판사인지 잊었는데, ‘주홍색 연구’부터 ‘셜록 홈스의 사건 집’까지 전집 9권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셜록 홈스 시리즈는 책 고르는 방법도 예외였다. 보는 즉시 사서 미친 듯이 읽었다. 셜록 홈스와 그의 친구 왓슨이 수수께끼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어린 마음에 그들이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품었었다. (심지어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책도 읽어보았다) 어떨 때는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뒤쪽부터 읽는 반칙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후회했지만.

얼마 본가를 가던 중 우연히 예전 책방이 있던 곳을 지나갔다. 그 오래된 3층 건물은 거대한 상가 건물로 변했고, 책방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책방이 있었던 곳을 쳐다보니, 책 냄새가 떠올랐다. 책방에 들어서면 났던 온갖 종류의 책 냄새. 나에게 선택을 받고자 코끝을 유혹하던 새 책 냄새.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책을 고르던 12살 아이로 돌아가 그 냄새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추억 속 한 귀 탱이에 오래된 책방과 책 냄새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책을 만나면 냄새를 맡는다. 추억이 묻어나는 그 냄새가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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