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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ul 15. 2020

길에 놓인 행복을 밟다

알고 보니 행복이 내 발밑에 있었네.

유독 걷고 싶은 날이었다. 점심이 다가와 길동무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다행히 구내에서 식사한다고 시간이 된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간단히 싸온 감자와 계란을 먹으며 넋 놓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카톡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얼른 등산화로 갈아 신고 뛰쳐나갔다.

날은 가을처럼 선선했다. 특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오늘은 평소 가지 않았던 길을 가보기로 했다. 예전에 한번 가보았던 동산 아래 정원이 생각났다.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둘의 공통 화두는 '이사'이다. 연일 나오는 부동산 대책으로 시장은 차갑게 얼었다. 걸을 때까지도 답답함을 더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동무는 MBTI가 ESTJ이고 나는 ISFJ이다. 나는 연신 새로운 자태의 자연을 보며 감탄하고 있으면 그쪽은 계속 무언가를 하자고 한다. 심지어 자연을 주제로 사행 시를 짓자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했다. '자연사랑'을 나에게 던지더니 힘차게 '자'를 외쳤다. 이런. 당황스럽게 시리.

자 - 자유롭게 저 들판과 하나 되리.
연 - 연둣빛 잎사귀는 파르르 나를 반기네
사 - 사방이 자연의 소리로 가득한 곳,
랑 - 낭낭히 그 길을 걸어가리.

시킨다고 하는 건 또 뭔지. 나도 길동무에게 '바람 소리'를 내주었다. 재밌는 답을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쉽네.

웃고 떠들다 보니 산언저리 정원에 도착했다. 꽃들이 가득한 곳,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에 땀을 식혔다. 불쑥 연말에 일선 기관으로 내려갈 거란 말을 했다. 길동무 얼굴에 당황한 빛이 비쳤다. 내가 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꺼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내가 원하는 데로 했으면 좋겠다는 한마디 말만 했다. 그거면 되었다.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였다.

슬슬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예상보다 벤치에서 오래 머물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회사 입구에 다다라 크게 돌아가야 하는 곳 사이로 난 조그만 길을 발견했다. 와우. 이런 길이 있었다니.

얼른 가야 하는 것도 잊고 아기처럼 좋아하는 내 모습에 사진도 찍어 주었다. 부끄러워라.


사무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길동무가 물었다.

"형님. 형님은 매일 글을 쓰니깐 이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되겠죠?"

그럼. 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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