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독촉하는 행정팀 김 계장의 전화에 마음이 급해졌다. 왜 이리 안 될까. 벌써 30여 분 넘게 USB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다. 보안 강화로 별도의 입력창에 암호를 넣은 후에야 자료를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입력창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담당하는 박 주임에게 SOS를 청했다. 번개처럼 나타난 그는 어깨춤을 추며 자판을 요리했다. 그러기를 수 분이 지났다.
“계장님 이제 USB 꽃아 보세요.”
올래. 마법이 일어났다. 오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입력창이 모니터 한가운데 떡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제야 나타났니. 이어지는 박 주임의 촌철살인 한마디.
“인증 프로그램을 설치해야죠.”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허무함이 달처럼 차올랐다. 아차차. 최근에 컴퓨터 본체를 바꿨다. 그럼 당연히 프로그램을 새로 설치해야지. 자료를 담아 제출한 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때 나도 박 주임 같은 시절이 있었다. 처음 입사했던 때, 과장님들 대부분은 마흔이 넘어서부터 컴퓨터를 접했다. 젊을 때 손글씨로 문서를 작성해서인지 하나같이 명필이었다. 지렁이 굴러가는 내 글씨를 보곤, 예전 같으면 입사도 못 했다며 혀를 찼다.
잘은 못해도 기본적인 한글, 액셀, 파워포인트를 활용하는 나는 제법 쓰임새가 좋았다. 특히 이제 막 파워포인트가 기지개를 피기 시작했다. 모든 발표는 파워포인트로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길 정도로 집착했다. 선배들이 가져온 종이 뭉텅이를 줄이고 줄여 파워포인트로 구성하는 것이 주된 일거리였다. 어디 그뿐인가. 급하게 과장님이 호출해서 달려가면 컴퓨터를 고쳐달라는 요청이었다. 모니터가 안 켜진다고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만져보면 대부분이 연결선이 빠져있거나 접촉 불량이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는 날이면 남아서 부서 컴퓨터 모두를 손보았다. 졸지에 업무 분장표에도 없는 컴퓨터 담당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연차가 쌓일수록 직접 문서를 만들기보다는 받아서 정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전에는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네이버에 검색해서 해결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손이 가지 않는다. 모르면 잘 아는 동료에게 물어보아 해결하는 쉬운 길을 찾는다. 비단 컴퓨터뿐이랴. 전자기기를 사도 작동법을 잘 몰라 기본만 사용한다. 컴알못에 기계치가 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지난주부터 재택근무가 다시 시작되었다. 집에서도 업무 처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지시로 집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깔아야 했다. 별 것 아닌 듯 보였는데, 설치부터 써야 하는 업무 선택까지 한참을 헤맸다. 더구나 접속을 위해서는 회사에서 쓰는 공인인증서가 필요했다. 메일로 보낸 후 집에서 설치하려는데 계속 오류가 났다. 결국, 민원센터에 연락했더니 파일 확장자명을 변경하라고 했다. 맞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보안 문제로 인증서도 그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잘 알고 썼는데 점점 왜 이러는지. 신입 때 만났던 선배들이 떠오르면서 그때는 몰랐던 그들의 고충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으로 회귀하는 본능에 충실한 걸까.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T-800을 다시 만나 놀라 자빠지는 주인공 ‘사라 코너’처럼 기계의 역습이 몹시 두려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