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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14. 2021

주식 100억 부자의 제안을 거절한 그날

내가 미쳤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선배는 남달랐다. 차가 없는 대신 이동은 늘 택시로 했다. 심지어  그 먼 거리의 출퇴근도. 성과급을 받는 날은 친한 지인을 불러 고가의 음식점에서 대접했다. 돈은 반드시 현금으로 냈다. 그렇다고 허투루 돈을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행색을 보면 부자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평소에 등산복인지 일상복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계의 옷과 뒤 축이 거의 닳아 없어진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 당시 마흔 중반쯤 되었을 텐데 이미 머릿속은 작은 바람에도 마구 휘날릴 정도로 휑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무언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인상이었다.    

  

사실 처음엔 나와 접점이 없었다. 입사하자마자 A 부서에 발령받았고, 그 선배는 B 부서였다. 그저 지나면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날 때쯤 우연히 연결 고리가 생겼다. 그 당시 직장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밤샘 숙직이 있었다. 세명이 한 조였다. 함께 날을 새다 보니 지루한 시간을 이야기로 채웠다. 잘 몰랐었는데, 그 선배는 상당히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목소리도 화통을 구워삶은 듯 컸고, 능변가였다.      


언제는 본인이 살아온 스토리를 이야기해주는데 소설 읽듯 빠져들었다. 제주도에서 귤 농사를 짓는 평범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뒷전이었고, 친구들과 노는데 빠져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는 진학하지 못하고 공업고등학교를 갔다. 기술에도 큰 뜻이 없었고, 졸업 후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시점에 이전의 내신과 상관없이 1년만 공부하면 대학에 갈 기회가 찾아왔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친 듯 공부하여 부산에 있는 어느 대학 수학과에 붙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대학 졸업 후 조그만 보습 학원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친한 동료가 있었는데, 집안이 꽤 살았는지 부모님이 채권을 자식들에게 증여했다. 별 관심이 없던 그분은 선배에게 저렴한 가격에 팔았다고 한다. 이후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채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박이 났다. 그때부터 경제에 관심을 끌게 되었고, 종잣돈으로 주식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직장에 들어온 이유도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번듯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었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뒤늦게 준비를 했고 합격하여 서울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결혼도 마흔 넘어서 하였는데, 직장에서 만났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처음엔 둘이 연애한다고 했을 때 형수님 주변 동료들이 극구 반대를 했었는데, 선배의 상황을 알게 된 후에는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결혼 후 형수님은 바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선배가 좋은 목에 00리아 지점을 차려주었다고 한다. 가끔 벤츠를 타고 와서 동료들에게 밥을 사주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면 아내와 딸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애처가이자 좋은 아빠였다. 형수님은 사시사철 해외여행을 다녔다. 가끔 내가 부인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정도로.    

 

함께 숙직을 선 지 2년이 다 되었을 때쯤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농담도 하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 같이 숙직을 서던 다른 분이 피곤하다며 먼저 자러 들어갔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선배 눈빛이 변했다. 목소리 볼륨을 한 단계 낮추더니,     


“신 선생, 내가 몇 군데 알려 줄 테니 한번 투자해봐.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면 안 돼.”     


그러면서 주머니 속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내보였다. 그 안에는 진짜 몇 가지 주식 종목이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주체 없이 두근거렸다. 이건 뭐지. 내가 알기론 선배는 주식 관련해서 정보를 얻으려 접근하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냉정하게 관계를 끊었다.      

여러 생각이 끝도 없이 부유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철칙이 있었다. 주식과 로또는 하지 않을 것. 잠시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고민해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장 하라고 할 것 같았는데 웬일인지 내 결정에 맡겼다. 그날 잠도 자지 못하고 밤 새 뒤척였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     


다음 숙직이 돌아왔다. 그날 밤 선배에게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허허’ 하는 웃음을 지으며,   

 

“내가 살다 신 선생 같은 사람은 처음 보네. 보아하니 별로 경제관념도 없는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순간에도 말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수없이 들었지만 참았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두려움이 컸다. 1년 뒤에 선배와 나는 각자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헤어졌다. 그 뒤로도 가끔 문자 정도 주고받다가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선배의 소식을 들은 것은 5년 전쯤이다. 우연히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배가 퇴직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놀랍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렸다. 여전히 호통한 목소리로 그렇게 되었다며 껄껄 웃는데, 그 커다란 웃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제주도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연로하여 왔다 갔다 하며 도와 드리기 위해 그만두었다고 했다. 왠지 선배다운 이유였다. 언제 시간 되면 보자는 말을 나눴다. 나중에 알았는데, 선배 아버지가 농사를 짓 던 곳이 공항 부지로 지정되어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 함께 농사짓던 분들이 육지로 유학하는 자식 학비를 위해 땅을 선배 아버지에게 많이 팔아 큰 부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부는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 아닐는지.   

  

지금도 나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라는 요즘, 동료들과 있으면 이야기의 반 이상이 주식이다. 그럴 땐 그저 웃으며 모르는 소리에 맞장구를 칠 뿐이다. 나만 너무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을 보면 나도 별종이다.      


가끔 상상하곤 한다. 그때 만약 선배의 손을 잡아 투자했으면, 지금쯤 어느 한적한 곳에 카페를 하며 삶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아니야 결국엔 쫄딱 망했을 거야.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무수한 가정을 만들어 낸다. 그저 지금의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내 몫이려니 해야지.     


살다 보면 한두 번은 결정적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럼, 그때였을까? 아직 남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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