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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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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pr 22. 2021

출장 가는 길.

풍멍도 좋다.

각자 사연을 짊어진 채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다. 그들이 밟고 지나간 길을 따라간다. 오른손에 든 묵직한 가방은 오늘 성사해야 할 비장함을 더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역 광장은 한산했다. 내 앞에 회색 창 모자를 쓴 스님이 앉았다. 가만히 보니 운동화와 가방마저 회색 빛이다. 이리 맞춰 입고 어디를 가는 걸까. 기거하는 산속 절이라면 따라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전화를 착신한 탓에 아침부터 연락이 왔다. 할 수 있는 일은 처리하고, 안 되는 것은 내일로 미뤘다. 지금쯤 사무실에 있다면 좁디좁은 모니터 안에 하루를 가뒀으리라. 볕 도 잘 들지 않는 사무실에 종일 있다 보면 시간의 흐름마저 놓쳐 버린다. 봄이 밀려오는 여름의 뜨거운 열기 속에 사라지는 순간 말이다. 언제 이렇게 더위가 찾아왔을까. 오래간만에 갖춰 입은 양복 사이로 끈적한 땀이 흘러내린다.


지금 가는 길은 한 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씨를 뿌리는 단계다. 며칠째 눈이 빠져라 사업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뼈대에 살을 붙이고, 논리란 생명을 불어넣었다. 달달 외워 내 것으로 체득해야 하건만. 말은 꼬이고, 숫자는 계속 헷갈린다. 뼈 속까지 문과적 인간이 이럴  한스럽다. 그래도 이년의 시간이 다 되어간다. 어슴푸레 가다 보니 익숙함이 몸에 붙었다. 여전히 잘 하진 못해도 하고 있는 건 만으로도 처음 나를 봐서는 대견하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나를 해체하려는 눈빛에 휘둘리지 않고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한마디 한마디 정성스레 뱉어본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도 허공에 말을 건넸다. 덜컥 겁이 찾아왔다. 안될 것을 먼저 생각하는 몹쓸 불안함이다. 잠시 보고서를 덮었다. 창 틀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에 잠시 기댔다. 이건 풍멍일까. 이게 뭐라고 거센 파도가 잦아들었다. 자기 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할 수 있어.', '괜찮아.'


부담을 덜고 나니 그 자리는 슬금슬금 설렘이 걸어온다. 그래도 어디론 거 떠나잖아. 일상이 파괴되는 쾌감 같은 것. 남 들 다가는 월요일이나 금요일이 아닌 수요일에 연가 가는 느낌이랄까. 모두가 바쁘게 돌아갈 때 홀로 갖는 시간이 좋다. 마치 나만 아는 비밀 같은 것이다.


이제 슬슬 종착지가 다가온다. 괜스레 가방 든 오른손에 힘을 준다. 문득 돌아올 때를 떠올려본다. 가방은 저만치 밀어 두고, 기어코 들고 온 책을 읽으며 반짝일 그 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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