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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y 01. 2021

사라진 공간에 관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간만에 본가를 찾았다. 아이들 맛있는 것 해주겠다며 장 보러 나선 어머니를 따라갔다. 시장은 길 가운데를 두고 상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 동네는 참 변한 것이 없다. 못 보던 가게 몇 곳이 늘었을 뿐이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어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던 중 건너편 과일가게 옆 건물에 시선이 멈췄다. 한 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다. 이제는 저렴한 물건을 파는 공간으로 바뀌었네. 그렇다고 기억까지 모두 덮을 순 없다. 가끔 이런 사라진 공간을 다시 만나면 심장이 주체 못 하고 콩닥거린다. 생선 가게 나와 크게 손을 흔드는 어머니를 향해 걸어가며 아스라이 추억에 빠져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시장을 지나는 길에 거대한 포크레인이 목욕탕을 부수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워서 주말마다 가던 곳인데 아쉬웠다. 낙엽이 노란빛을 물들 무렵, 새로운 공간은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극장이었다. 영화광이었던 내게는 봄비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었다. 영화관이 문을 열자마자 친구와 달려갔다. 100석이 채 되려나. 작은 영화관이었지만 매점, 휴게 공간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몇 편의 영화는 지금도 남아있다. 먼저 처음 보았던 영화는 '불가사리'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보았는데, 공포영화였다. 사막에 나타난 괴생명체와 사투를 벌이는데, 스케일도 크고 손에 땀을 쥐는 장면도 여럿 있었다. 나중에 7편까지 시리즈가 이어지며 희대의 망작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화관은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한창 사춘기로 불이 차오를 때면 영화 한 편 보며 잠재우곤 했다. 그때 인생 영화를 만났다.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운 영어교사 존 키팅이 부임해서 학생들에게 진정한 꿈을 심어주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학생들이 책상에 모두 올라가 떠나는 키팅 선생님께 외치는 'Oh! captain, my captain'이란 대사는 지금도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키닝 선생님 역을 맡았던 로빈 윌리암스는 2014년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지만 영원히 참 스승으로 살아 숨 쉰다.


그 뒤로도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여전히 강렬하게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라스트 모이칸'이다. 1700년대 미국 식민지 시대, 부모를 잃은 영국계 백인 나다니엘이 쇠망해가는 모히칸족에 키워진다. 영국과 미국의 전쟁 속에서 사랑과 부족을 지키기 위해 전장 속에 뛰어든 한 사나이의 뜨거운 사랑에 어찌나 몰입되었던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도 당신을 찾겠소.'라는 대사가 잊히지 않았다. 눈이 참 아름다웠던 여주인공 매를린 스토우에게 빼앗긴 마음을 되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창 영화관이 절정일 때는 늘 만석이었다. 심지어 매진되어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점점 지역 명소로 자리 잡았다. 꽤 오랜 시간 유지되었던 공간은 CGV, 메가박스 등 대형 멀티플레이스 영화관이 진출한 90년대 중후반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양질의 영화를 보여주던 자부심은 어느새 에로 영화를 동시 상영하는 곳이 되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을 닫았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무척 아쉽다.


최근에 지인 소개로 '내가 사랑한 영화관'이란 책을 읽고 있다. 오랜 기간 지역을 지키고 있는 작은 영화관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읽으며 동네에 있었던 영화관도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대형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독립 영화나 특색 있는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사라짐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영원히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곤 한다. 지금은 이름조차 모르겠어 동네 영화관으로 기억되는 그 공간이 그렇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나에게 소중한 추억의 한 줄을 새겨준 공간에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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