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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Dec 22. 2021

컵라면은 육개장이지

일상의 소소한 함이 행복으로 돌아올 때

날이 참 좋았다. 따뜻한 기운이 사무실까지 감쌌다. 이럴 땐 점심 산책으로 오래 주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공원 길이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옆 부서 선배 둘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렇게 길벗을 포함한 네 명이 길을 나섰다.


주말 동안 내린 눈은 반쯤 녹아지면을 질퍽거리게 했고, 흙 속에 숨어 미끄러움을 유도했다. 그래도 우리는 맑은 날과 닮은 환한 웃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틀 동안 꾀 피운 다리는 오래간만에 움직였다고 뻐근했다. 그래도 짱짱한 그 느낌이 좋았다. 조금 걸었는데도 겨울 햇살에 뜨거운 기운이 온몸 가득 차올랐다. 슬 이마에는 땀이 송글 맺혔다.


서둘러 나온 덕에 공원 호수를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이 길은 최근에 발견했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흙길이라 걸을 때 전해지는 푹신함이 좋았다. 사람들만 없다면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걷고픈 충동이 일었다. 중간쯤 다다라서 호수를 바라보면 그리 마음이 평온할 수 없었다. 선배와 길벗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잠시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윽한 풍경은 눈에 머물러 떠날 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단골 가게에 들러 김밥을 샀다. 그리곤 회사에 도착해서 지하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이미 떠나기 전 그곳에 컵라면도 준비해 놓았다. 포장지를 열고, 뜨거운 물을 붓고 조촐한 점심을 시작했다. 호호 불며 면발을 호로록 빨아들이고, 국물에 김밥을 적셔 먹었다.


갑자기 선배 중 한 명이 '컵라면은 육개장이 최고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폭풍 공감하며 중학교 때 처음 나왔으니 역사가 깊다니, 군대에서 근무 서고 돌아와 먹었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등 라떼 이야기가 쏟아졌다. 심지어 첫사랑과 처음 먹었던 그날을 기억하는 아련한 추억까지. 누구나 가슴 한 편에는 육개장 사발면 사연을 담고 사는 걸까. 하긴 긴 시간이 흐르고, 새로 나온 컵라면도 많지만 이상하게 나도 여기에만 손이 갔다. 이유는 제일 맛있으니깐.


뱃속 단단히 채우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 점심때 이렇게 걷고 나면 용기가 샘솟는다. 좋은 기운 받았으니 까짓것 오후는 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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