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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an 12. 2022

내 나이 마흔여섯, 부끄러움을 내려놓다.

부끄러움은 남의 몫

"골~!, 골~~!"


강력한 중거리 슛이 아들의 골문을 통과할 때 내 입에서 거대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오른팔은 천장이라도 뚫을 듯 위로 솟구쳤다. 이것은 무의식적 행동이요 오래도록 동면했던 '자아'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장모님과 통화 중인 아내는,


"지금 실배 서방이 첫째랑 게임하면서 저래 고함치고 있어요. 낼모레 오십 인 사람이나 중학생이나 하는 짓이 똑같으니 쯧쯧쯧...."


아마도 내 소리에 놀란 장모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쪽팔릴 여유조차 없었다. 내 골문을 향해 미치도록 달려오는 아들의 아바타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우리는 환희와 좌절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서로의 진영을 탐미했다.


회사에서 할 일이 잔뜩 있음에도 칼퇴근을 했다. 왜냐하면 점심때 게임 컨트롤러가 도착한다는 택배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급하게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잘 받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게 뭐라고. 회사에서 있는 내내 설렜다. 손가락은 모터를 단 듯 춤을 추었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줄인 체 작성한 보고서를 부서장에게 검토받았다.


지난 주말 게임기가 도착했으나 아쉽게도 컨트롤러가 하나밖에 없었다. 아들과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했다. 당근에서 저렴한 것을 사려했더니 이왕이면 좋은 것을 사라는 아들의 조언에 정품을 구매했다. 그것은 일주일 치 점심값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눈물을 머금고 결제를 했다. 수시로 쇼핑 사이트에 접속해서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들에게 전화해서 컨트롤러 세팅을 부탁했다. 집에 오자마자 겉옷만 대충 벗어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도착한 녀석은 세련되고 잘생긴 검은색이었다. 아들의 흰색과 구별하기 위해 다른 색을 골랐었다.

둘이서 흥분을 주체 못 하고 축구 게임에 접속했다. 왼쪽 심장은 평소보다 1.5배 이상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들은 선심 쓰듯 좋은 팀을 양보했다.


드디어 운명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다. 야수처럼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었고,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들은 내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아마도 평소 게임 한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방심한 듯했다. 이래 보아도 한 때는 게임계에서 방귀 좀 뀌었다고. 전후반 각각 한 골씩 넣어 2대 0으로 승리했다. 나의 포효는 오래도록 끝날 줄 몰랐다.


아들은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뺨이 벌겋게 물든 채,


"아빠. 좋은 팀 골라도 돼?"

"그럼. 마음대로 해."


눈에 독기를 품은 아들은 그때부터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손끝은 찬란하게 빛났고, 나의 공격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리곤 그간 습득한 모든 기술을 쏟아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또다시 2대 0이었다.


묘하게도 득실차까지 같은 승부였다. 결론을 내려고 한게임 더하려 했으나 아내가 숙제해야 한다며 제지했다. 속으론 다행이었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나도 씻으러 가기 전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아빠랑 게임을 하니깐 좋아?"

"으.... 응. 좋아."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자식. 그 정도 표현이면 정말 좋았다는 뜻이었다. 매번 게임한다고 잔소리만 해서 한창 사춘기의 절정을 찍고 있는 아들과 멀어졌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히고자 게임기도 사고 함께 게임을 해보았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진작 살 것 그랬네. 어째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러다 회사 조퇴까지 하는 것은 아닐는지. 몹시 두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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