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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ug 27. 2022

움푹 들어간 자국, 그저 그런 하루가 아냐.

사랑하는 책과 글이 있어 주말은 숨 쉴 수 있다.

토요일 아침, 주중의 피로가 아직 내 안에 남아 맴돈다. 무거운 돌덩이 같은 머리를 간신히 베개와 분리하고 씻으러 화장실 향한다. 아내가 일하러 떠난 집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흐른다. 문이 굳게 닫힌 방 안에서 각 자의 세상 속에 빠져나오길 거부하는  아이들을 기어코 식탁 의자에 앉힌다. 입이 뾰족이 나온 둘째를 애써 면한 채 냉동고에서 꺼낸 곰국을 끓여 소박한 아침을 맞이한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끄적거리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안방으로 가 까맣고 널따란 가방 안에  하나 둘 짐을 챙긴다. 소설책, 태블릿, 그리고 긴 팔 셔츠와 충전기를 넣었다. 일관성 없는 물건들에 표면이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했다.  

 

첫째는 준비를 마치고 방 밖에서 학원 데려다 달라고 재촉했다. 알았다고 잠시만. 아파트에서 주차장까지의 짧은 거리에도 시원한 바람은 뺨에 가을 가을 했다. 계절은 소리 없이 찾아와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떠난다. 문득 걷고 싶었다. 족히 10분이면 될 텐데. 그 말을 꺼내는 순간 펼쳐질 일그러진 표정, 거친 목소리가 떠올라 그냥 차에 시동을 걸었다.  문을 열고 "갈게."란 짧은 두 단어만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뒷모습에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한데 서운함은 차올랐다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주차를 하고 집에 들어가 둘째에게 인사를 고했다.


"아빠 나갔다 온다."

"응. 난 친구 만나."

"저녁은?"

"몰라."

"이따 연락해."

"알았어."


어느새 둘째와의 대화는 긴 글에서 단문으로 향했다. 유독 혼자 있기 싫어했던 아이는 어느새 주말이면 꽉 들어찬 일정으로 나를 혼자 두게 만들었다. 천천히 걸었다. 카페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신호등을 세 번이나 건너야 했다. 신호 기다리는 동안 가로수가 만든 그늘을 한 뼘 비켜 굳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집 안 컴컴한 구석에 놓인 다육식물처럼 종일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답답했다. 고작 몇 분의 시간에도 햇살은 따스히 몸을 덥혔다.


카페 문을 열기 전 살짝 마스크를 내렸다. 공기를 타고 코로 흘러오는 진한 커피 향은 이유 없이 설레게 만들었다. 아이 몽글몽글해. 동그란 테이블에 쿠션이 있어 등을 받힐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태블릿을 거치대에 놓고 한글 hwp을 열었다. 새하얀 화면 앞에 두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며  아직 내 안에만 머물러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이야기는 어디로 나갈지 몰랐다. 글은 파란 하늘도 되었다,  작은 돌담길도 되었다, 짙은 향수도 되었다.

글이 막힐 땐 잠시 덮고 책을 펼쳤다. 작가가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고민했을 문장을 음미하며 점점 빠져들었다. 이럴 땐 주변에 암막이 쳐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책 속의 주인공만이 현실의 자리를 채웠다. 이대론 내가 사라질 것 같아. 어쩜 그래. 부러워 미칠 듯해. 나도 언젠간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할 수 있을까.

  

간신히 멈추고 작가의 세상에서 벗어났다. 긴 여운을 남기고, 화면을 다시 켰다. 내 글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용기 내 끝까지 가본다. 처음부터 소리 내 읽고, 오탈자도 수정했다. 쓰면서 몰랐던 튀는 문장도 보드랍게 다듬었다. 어느새 창문 밖은 세피아 색으로 물들었다. 전화기를 꺼내 둘째에게 연락했다.


"아빠야. 어디야?"

"친구랑 헤어져서 집에 가는 중. 배고파."

"그래? 뭐 먹고 싶어?"

"음.... 몰라. 일단 빨리 와."


일상의 오라는 말이 특별해지며 짐 정리하는 손이 바빠졌다. 첫째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서둘러 일어서다 돌아보니 실패로 있었던 내 자리에는 움푹 들어간 자국이 남았다.

 

그 흔적은 사랑하는 글과 책과 함께한 그저 그랬던 하루가 아니었음을 나타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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