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로드
- 보라카이 여행 중 선셋을 보며 떠올린 글 -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삶의 숨소리조차 발견할 수 없다. 고독조차 사치였다.
미칠 듯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나는 개척자다. 내가 가는 길은 역사요. 종이에 남길 기록이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른다. 내 손을 꼭 붙잡고, 포도알 같은 눈물을 쏟아내던 어머니. 깊게 팬 주름골을 타고 물줄기가 옷섶을 적혔다. 그날따라 푹 꺼진 검은 눈동자가 땅 끝으로 꺼진다. 모질게 돌아선 어깻죽지 너머로 통곡소리가 희미해졌다.
갑자기 힘이 빠진다. 얼마큼 걸었을까. 하루? 이틀?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바싹 마른 다리가 한없이 미안해진다.
배고픔도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긴 언제 목구멍에 음식을 넣었는지 조차 가물하다. 잠시 쉬어가자. 어차피 목적지도 모르는 길 아닌가. 산 길 옆으로 적당히 쉴 곳을 찾았다.
수풀을 헤치고, 메마른 땅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겹겹이 쌓인 나무 잎사귀가 빛의 통로를 차단한다.
내 몸 곳곳에 내려앉은 열기가 바람에 실려간다. 시원하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싶다. 사람 참 간사하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눈꺼풀이 쇳덩이처럼 무겁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길 몇 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린다. 악몽을 꾸었는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대로 망부석이 될 것은 두려움에 서둘러 자리를 턴다.
수풀 밖을 벗어나니 발 다닥의 감촉이 새롭다. 분명 딱딱한 느낌이었는데. 점점 부드럽다. 어두워지는 주변을 보니 곧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발걸음에 속도를 부친다. 빨리 평지를 찾아야 한다.
좁다란 숲길을 지나갔다. 점점 길이 넓어진다. 드디어 길 끝에 다다랐다. 입구에 마치 수호신처럼 서있는 거대한 야자수 나무를 벗어나니,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그곳엔.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토록 찾아 헤맨 바다다. "아"하는 외마디 탄성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의식을 잃은 체 쓰레기처럼 이곳에 버려졌다. 눈떠보니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웠다. 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너덜 해지도록. 마침내 삶의 희망을 찾았다.
새하얀 모래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신발을 벗고 그 부드러운 모래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뒤늦게 비릿한 바닷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모래 결까지 보이는 투명한 바다. 태양 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인다. 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 거대한 태양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미소를 지으며 연신 오라는 손짓을 보낸다. 푸른 바다 사이로 금빛 다리가 놓인다. 나는 길을 건너야 한다. 저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자.
바닷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온몸이 금세 바닷속에 잠겼다. 이상하다. 숨이 막히지 않는다. 입가엔 미소마저 돈다. 전에 가봤던 길처럼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아간다.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길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