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계절학기 클릭 한 번으로 나락에 빠진 내향인
위기는 언제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찾아온다
"나랑 같이 편입 준비하자."
1학년 종강 파티가 열린 시장 안에 있었다. 자욱한 연기, 독한 소주와 탄 고기 냄새가 어우러져 정신이 혼미해질 찰나 앞에 있던 범준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 친하지도 않던 녀석의 그 한마디는 내 안에 거대한 파장을 만들었다.
우리는 널브러진 친구를 두고 좁고 진득거리는 길을 지나 시장 밖으로 나갔다. 외투도 없이 한겨울의 밤기운은 태엽 풀린 인형처럼 온몸을 달그락거리게 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서로 붙여주며 하얀 구름을 날려 보냈다.
“아까 무슨 소린데.”
“나 2학년 때부터 편입 준비할 건데 같이하자고.”
"왜 난데?"
"너도 나 같아서."
그 한마디에 모든 의미가 담겼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말 그대로 1학년을 망나니처럼 보냈다. 수업은 거의 들어가지 않고,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방황의 방황을 거듭했다. 겉으론 대학의 낭만을 부르짖었지만, 속으론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했건만.
범준이는 대학을 재수했다. 나와 어울리는 그룹은 아니어서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건 너 보이는 그 친구의 모습도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목표를 갖고 의기투합했다. 그때부터 발길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편입을 위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공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1학년 때 망쳐버린 학점이 문제였다.
2학년 1학기를 마칠 때쯤 중대한 결정을 했다. 바로 여름 계절 학기였다. 망친 학점을 만회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변수가 있었으니 학기 초 수강 신청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했다는 점이다. 범준이는 다행히 원했던 과목을 선택했지만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남은 과목이 하나 있어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얼른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이름하여 '레크리에이션의 이해'였다.
하필이면 레크리에이션이라니. 솜털이 온몸에 바싹 솟으며 불안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여름 계절 학기가 시작되었다. 장소는 대학에서 가장 큰 대강의실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족히 100여 명은 넘어 보였다. 교수님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만큼 미모가 출중했다. 수업에 앞서 조교가 조를 공지하였고, 그에 따라 헤쳐 모였다.
침묵이 흐르고, 어색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내 눈에 비친 조원의 포스가 남달랐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3, 4학년이었다. 그중 남자들은 모두 복학생이었다. 취업을 앞두고 학점 세탁을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1학년이라는 내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때부터 살짝 내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수님의 학사 일정 소개가 있었는데 초반부에는 이론 교육을 하고 그다음부턴 조별로 레크리에이션 발표가 있다고 했다. 순간 강의실 안은 적막이 흘렀고,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고, 떠보니 조원 모두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잠시 조별로 발표자를 선정할 시간을 주었다.
열띤 논쟁이 펼쳐질 거란 기대와 달리 저마다 이 짬에 내가 하리라며, 막내인 내가 해야 한다며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발표 불안이 있다. 학점을 망치고 싶냐는 자그마한 협박은 이미 물방울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그럼. 끝났네. 기념으로 한잔하러 가자. 내가 쏠게."
우두머리인 경영학과 4학년 형님을 따라 우리는 그날 낮부터 밤까지 술을 펐다. 신기하게도 그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조원 선배들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건 모두 간식, 밥, 술이었다. 발표 준비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는지. 때때로 술에 기대,
"실배야. 이번 학점 나에게 중요한 것 알지. 부담 주려는 것은 아닌데 널 믿어."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픈 마음뿐이었다. 신은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은 주는 것일까. 곁눈질로 바라본 다른 조들은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 보였다. 역할 분담도 잘 된 듯하고 저길 갔어야 했는데 하는 심정에 계속 바라만 보았다.
시간은 애석하게도 빠르게 흘러갔다. 다음 주부터 있을 조별 발표 순서가 정해졌다. 그나마 2주 뒤 두 번째였던 점이 다행이었다. 이마, 손, 목덜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마지노선에 다다랐다. 수업을 마치고 범준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얼굴 못 본 지도 좀 되었으니 자주 가던 시장에서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그땐 몰랐다. 그날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될 거란걸.
매거진에서 발행한 글을 퇴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