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의 자기소개서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中
작년 12월 1년 간의 호주살이를 마무리하면서, 남은 패기를 똘똘 뭉쳐 카메라 하나를 들고 길에 나섰다. 영상 편집자로 일하는 호주인 룸메이트와 함께 동네 사람들에게 ‘지금 행복하세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하고 인터뷰하는 작은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답변들이 기대 이상으로 낭만적이어서 여운이 짙게 남았었다.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아주 추상적인 개념이라 언어로 정의하기조차 어려운데, 나는 삶의 전반적인 만족감, 삶에서 오는 긍정적인 감정의 총체, 죽음충동을 빗겨서 삶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너에게 행복이 뭐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널 살아가게 하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너만의 답은 무엇이니?’를 묻는 것과 같은, 꽤 묵직한 물음이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통해 이 질문들을 세상에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꿈꿔왔다. 수만가지 행복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나만의 답을 찾아 이야기로 전달하고 싶다고.
소박하게나마 내 꿈을 실현했던 작년 12월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한나절 동안 인터뷰한 멜번 브런즈윅의 이웃들 대다수가 거침없이 ‘네, 지금 행복해요.’ 하고 답해서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즈음 한국의 가장 큰 화두가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서 그런지 신선한 충격이었다. 행복의 이유는 또 각양각색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대답을 소개해 보자면,
한 이란 출신의 굴곡진 삶을 살아오신 할아버지께서 껄껄껄 웃으며,
"행복은, 삶과 죽음 사이의 텅 빈 공간을 오롯하게(fully) 채우는 것,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찾아오기 마련인 거지. "
하셨다. 어쩐지 노자를 떠올리게 하는 답이었다.
세상의 모양이 혼탁함에서 가지런해지니,
먼저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어 홀로 존재하며 바뀌지 않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아직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글자로는 '도(道)'라고 한다.
-노자 <도덕경> 죽간본 11장
노자는 ‘도’가 텅 빈 그릇 같지만 못처럼 깊은 것이므로, 올바른 삶의 도리는 곧 충만함에 처해서 비움을 온전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간순간에 충실하면서 마음을 비워낸다는 할아버지처럼.
키가 무지 크셨던 한 시니컬한 남자분은,
"해가 비쳐오고, 엔돌핀이 돌고, 저 지금 꽤나 행복한 것 같은데요? 행복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거죠. "
하셨다. 이번엔 불교였다. 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개척하는 것이라는 유심주의 불교철학의 ‘작복’. 욕망과 조건의 취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자유, 열반의 행복까지 이야기하진 않으셨지만, 행복에 있어서 마음가짐의 중요성은 이후의 대화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하셨다. 확고한 행복 철학을 가지고 사는 분 같았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은, 수많은 실험 자료를 근거로 들며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일상의 순간순간’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렸다. 내 눈물 콧물을 쏙 빼놓은 요즈음의 한국 드라마들, 사랑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이야기하는 ‘사랑이 곧 구원’과도 맞닿는 결론이었다.
치열했던 내 고3 시절을 떠올려 보면, 모든 어른들이 하나같이 내게 ‘너의 한계를 깨고 저 높은 곳을 보며 미친 듯이 노력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쟁취하고 풍요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해줬다. 그때는 독기와 욕심이 우리 미래의 성패를 점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럼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세상에 보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욕심도 참 많고, 그럼에도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꼭 맞는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요 근래 아주 낯설고 다양한 환경들에 나를 던져가며 나 자신과 행복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보고, 고전과 신화에 감동해 가며 얄팍하게나마 내려본 나만의 답,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꿈’이다.
‘꿈’ 역시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개념인데, 내가 생각한 꿈의 정의는 ‘진정한 나'의 욕망이다. 나, 자기(self), 자아(ego), 다양한 정신분석학 용어들이 가리키는, 진정한 내면의 내가 추구하는 바.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진정한 자신의 욕망, 이상을 올곧게 추구하는 것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꿈을 꿀 때, 가장 벅차고 행복했던 것 같다. 나의 큰 이상을 꿈꾸면서, 각자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순간순간.
그러나, 욕망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불완전함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불완전한 인간의 욕망과 꿈은 절대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의 철학자 라캉의 이론을 빌리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실재한다고 믿는 단계, 욕망 충족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 여전히 욕망이 남아 또 다른 다음 대상을 욕망하는 단계를 무한히 반복한다. 또 도가의 사상을 빌리면, 무언가를 바라고 행위를 할수록 혼돈이 찾아온다. 욕망의 한계에 대한 이론과 사례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숙명적인 고독 역시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스피노자는 존재가 그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힘 코나투스가 곧 욕망이며,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실체 속에서 타자와 관계를 맺어야만 의미 있다고 했다. 사랑의 욕망도 대상이 있어야 기능할 수 있고, 승부욕도 이길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듯 욕망 추구에 있어 타자와의 연결은 필수적이고, 우리는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삶의 필수 요소인 타자와의 연결은 나의 욕망, 나의 꿈을 찾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처럼, 부모, 친구, 사회가 주입한 타자의 욕망, 인정 욕구 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쉬지 않고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가상의 공간에서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어렵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들의 욕망과 꿈이 격동하는 이 사회는 혼란스럽기 그지없고 예측 불가능한 위기들, 아이러니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힘보다 더 크고, 높은 것, 우리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 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지점, 삶의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개념이 ‘운명’이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빛나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운명도 욕망과 꿈의 대척점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운명적인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동력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때로는 알 수 없이 힘겹고 잔인한 운명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떻게 꿈꿔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영웅이 탄생했다.
신은, 인간과 달리 혼자서도 온전하고 죽음 없이 오롯한, 인간만사를 총괄하는 천상의 존재이고 인간이 창작한 이야기 곳곳에서 운명은 신의 뜻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영웅은 인간이면서 신을 닮아, 신이 내리는 시험에 맞서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사랑과 용기를 바탕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이상을 꿈꾸면서 모범적으로 타자와 연결되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나간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속 오이디푸스는, 그 어렵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왕이 되고 아름다운 왕비도 얻었지만, 나라에 역병이 돌기 시작하고, 이것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얻어낸 자신의 운명 때문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방랑길에 오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아픈 진실일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누구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그리고 끝내 답을 찾았을 때, 테베의 백성들을 위해 잔인한 운명일지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고통을 지팡이 하나로 짊어진 채 길을 나선다. 읽기만 해도 둥둥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웅장한 코러스와 함께, 우리는 이 비극적인 영웅의 이야기에 압도된다. 그 끝에 허망함이 아니라 숭고한 아름다움이 남는 이유는 오이디푸스의 영웅성에 있을 것이다.
인간에서 출발해 신이 된 영웅도 있다. 우리 민간신앙의 대표 신, 원천강의 시간을 주재하는 ‘오늘이’가 그러하다. 들에서 태어난 옥 같은 아이 오늘이는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에 답하기 위해 끝이 정해지지 않은 험난한 여정길에 오른다. 인간, 연꽃나무, 뱀 등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고, 선녀들을 도와주며 머나먼 길을 헤쳐간 끝에 그녀는 부모님을 만난다. 항상 오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담담하게 딸을 맞아주는 부모로부터 연꽃과 뱀과 인간을 도울 실마리를 찾아 그들에게 행복을 선물한 후 오늘이는 원천강의 신녀가 된다. 적막한 들에 홀로 태어나 원천강을 찾아가야 하는 힘겨운 운명일지라도 그를 긍정하고, 온갖 역경을 헤쳐가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을 힘껏 굽어살피는 신화적인 영웅을 그린 이야기이다.
용맹한 영웅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가고, 지금 우리의 가장 큰 화두는 ‘불행’이 되었다. 우리 운명은 퍽퍽하고, 일상에 무기력과 공허함이 가득하니, 현실을 조각내서 숨어있는 행복을 찾아내 보여주자고, 1분 더 설렐 내일을 기다리자고, 죽지 말고 살아가자고 서로 위로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의 본능이 삶을 붙잡고 이끌어가던 위험천만한 시대들을 지나와서 삶충동이 많이 약화된 건지, 존재의미와 동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영웅의 흔적은 곳곳에 면면하게 남아있다. 9와 4분의 3의 승강장 뒤편에는 번갯불 표식을 한 마법소년이 악에 맞서 선을 지키고 있다는 상상, 꿈꿔왔던 승부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몰입하는 스포츠 선수에게 보내는 환호,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기꺼이 확성기를 켜는 사람들의 벌건 핏대. 가득 호연지기를 품고 세상에 쿵- 쿵- 큼직한 발걸음을 내딛는, 꿈을 꾸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이 불행의 시대에 또 다른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유학의 바탕에는 우리 그리고 우리 너머의 천지만물이 태극의 이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현실이 위기투성이 잿빛이라도, 모든 것의 본성은 덕과 선으로 환히 빛나고 있다고, 세상 어딘가엔 선함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오늘이가 마침내 만난 부모가 '넌 들판에 홀로 태어났지만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항상 지켜보고 있었노라' 하는 것처럼. 나는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있을 선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꿈을, 영웅들을 꺼내어 펼쳐 보이고 싶다. 타고나길 삶과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거라 믿는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닮은,
우리를 닮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