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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Jun 27. 2023

2023.06.25-6 동해 템플스테이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흘러가는 기억들을 최대한 끌어안고 싶어 내 낡은 여행수첩을 펴서 쓴다.


1. 시작


아주 따뜻한 동네로 여행을 다녀왔다. 밤이면 반딧불이와 별이 빛나고 낮이면 짙은 초록빛 산자락에 물안개가 자욱한 동네였다. 여기서의 마지막 기억은, 버스에서 갑자기 버즈 케이스를 잃어버려 하차 정류장도 놓치고 어버버하던 날 위해, 팔 안 닿는 버스 저 구석까지 기어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케이스를 찾아주신 한 동승객 분에 대한 기억이다. 사람 사이 정이 두텁고, 같은 강원도의 강릉이나 춘천에 비해 훨씬 덜 알려졌고 덜 개발됐지만 그만큼 풋풋한 매력이 있었다.

바로, 동해.




2. 휴식의 정의


쉬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쉼이 뭔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휴대폰을 24시간 만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시간은 넘쳐흘렀다. 졸음, 지루함과 씨름하고 난 뒤 정신이 맑아질 때마다 계속 ‘나’와 ‘쉼’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참 별 거 없는 결론이지만 짧게 나의 답을 소개하자면,


잠과 취미생활 그 사이 어딘가쯤 있는 듯한 ‘휴식’의 본질은 멈춤과 편안함이다. 생업, 가사일, 일상 속 괴로움, 각종 인위적인 자극을 멈추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찾은 상태.


멈춤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명상의 기본은 호흡을 자각하고 들숨과 날숨을 인지하는 거라고 했다. 들숨 후- 날숨 하- <하나>, 들숨 후- 날숨 하- <>.... 이런 식으로. 잡생각과 휴대폰의 유혹, 압도적인 적막함을 이겨내는 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꼭 호흡명상만이 아니다. 수많은 콘텐츠들과 그것들이 자극하는 욕망의 홍수 속에서 노력해서 멈추고,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모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순간이 좋은 쉼이 된다. 깊은 산 속의 조용한 절에서 시간의 흐름, 잎사귀 소리, 나무에 은 새, 습기 어린 땅의 냄새와 같은 것들에 집중할 때, 감각들이 생동하는 것 같았. 제대로 쉬고 있구나- 생각했다. 서울에서의 쉼을 돌아보자요리할 때가 숨통 트이는 휴식시간이었다. 일상적인 식재료와 각종 맛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인지하기 시작하고, 나를 위하고 대접하는 마음 외의 일체 자극을 멈추고 집중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어떤 분은 주전자 물줄기와 다양한 종류의 씁쓸한 맛과 잠깐의 여유를 통해 자극을 덜어내고 휴식을 취한다고 하셨다.


편안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본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우리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사람에 대한 정과 사랑이 충만하고, 자신에게 충실하고 솔직하면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동심 어린 상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지쳐서 따뜻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세상에 맞추어 살다가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을 때, 모든 게 귀찮고 무기력해질 때가 가장 휴식이 필요한 순간들이기에.




3-1. 정


1200년 된 절 삼화사로 템플스테이를 가면 방마다 ‘소통의 장’이라고 라벨이 붙은 노트를 보게 된다. 왜 템플스테이를 오게됐는지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등등 가볍게 속생각을 공유하는 노트인데, 나는 꽤 두꺼운 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어마어마한 위로를 받았다. 다들 절에서 묵으면 시인이 되는건지. 꾹꾹 눌러쓴 펜 끝에 묵직한 진심이 느껴져서 읽는 내내 마음이 일렁거렸다. 나도 조그맣게 몇 글자 적었는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혹시 삼화사의 ‘지혜’ 방에 묵을 사람이 있다면 아마 내 글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글은 ‘괴롭네요, 힘들었어요, 불안했어요’ 에서 시작해 ‘다들 힘드시겠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의 평안을 마음깊이 기원합니다. 우리 같이 힘내요’로 끝났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온 절에서 익명의 다수에게 남기는 흔적 같은 글이니 분명 꾸밈없는 진심이 묻어났을 데, 그게 ‘나’의 힘듦에 대한 고백에서 시작해서 ‘너’의 힘듦에 대한 위로와 ‘우리’에 대한 다짐으로 이어지고, 대부분의 글이 그랬다는 게, 그 자체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 노트를 연 이상, 인간의 바탕에 정과 사랑이 있다는 걸 믿지 않을 수 없다.


삼화사의 분위기 영험하면서도 포근한 건, 서로의 평안을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의 온기가 공기마다 알알이 들어차 있기 때문인 게 분명하다.


[첨부: 템플스테이 시인들의 인상깊었던 글귀들]

• 마음의 괴로움이 이곳으로 이끌었고, 여기서는 아무 이야기도 듣거나 말하지 않으려 했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는 건 이미 충분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보다 어떻게 살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내가 1년의 해외살이를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생각. 똑같은 생각이라 놀랐다)

• 우리는 몇천,몇억년에 걸쳐 이어질 인연이니, 소중히 하자

• 쉬러 온 산에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더라. 나는 왜 도시에서 더 나태해질까.

• 아무리 흔들려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싶다. 미움과 증오, 성냄과 시샘에서 자유롭고 싶다.

• 고요가 주는 위로가 필요했다. 난 그 간 버리지 못하고 채우고만 살았구나.(자극추구형인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됐다.)

• 취업자소서를 쓰며 내 강약을 계속 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초월적인 ego로서의 자아는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진짜 나.

• 환승역 계단을 스치는 흑백의 사람1  말고 색깔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무기력함도 내려놓아야 해요 (무기력을 떨치는 데 내려놓는다는 표현을 쓰신 게 신기했다)

• 정념이란 자신의 생각을 바로 알아차리고 끊어내는 것.

• 결코 주저앉진 말고 다시 일어나서 세상이라는 큰 자연에 맞서고 극복하자.

•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자. (꾹꾹 눌러쓴 온존재 라는 표현에 정말 찌르르하고 어딘가 울렁울렁했다)

•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를 뚫고 나와 자기만의 카이로스(내 내적 시간)를 확보해 그 시간 속에서 삶을 바라보라.

• 무릉계곡 입구를 들어서며 마주하는 광활한 자연과 조금 더 천천히 흐르는 체내시계

• 자연이 흔들어놓은 심장박동수에 맡겨라

•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게 우리의 집중력을 공격하는 것 같아요(영국인 분의 귀여운 표현력)

• 쉽지 않겠지만 온전히 행복해지기를 소망합니다

•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게 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어요

• 멋진 이를 보며 따라 웃기보다 숨기 바빠지던 요즘

• 자존감은 소화가 느리다

•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때 조심히, 안녕히 가시길.


노트 앞에 스님께서 붙여놓으신 글

현재를 보지 않는 눈으로 미래를 밝게 느낄 수 없으며 밝히지 못한 미래는 다시 현실이 되고 과거로 남게 된다.


3-2. 반딧불이


저녁, 스님께서 명상이 끝날 때즈음, ‘이것이 중헌 게 아니여 반딧불이 중허지!’ 하시며 우리를 밖으로 밀어내셨다. 칠흙 같이 깜깜한 두타산의 밤. 기독교가 모태신앙이지만 템플스테이를 사랑하는 우아한 중년 한 분, 그리고 낭만을 사랑하는 2-30대 셋이서 휴대폰 플래시에 의지해 얕은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상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라, 장마 직전 물이 얕은 계곡에선 멋드러진 산소리보단 꼭 샤워 물줄기 같은 소리가 났고, 절 근처에서는 코를 찌르는 맛있는 찌개 냄새가 진동했으며, 땅도 하늘도 나조차도 새까만 밤은 생각보다 많이 무서웠다. 서로 무서워서 ‘아니 이거 스팸 아니면 이 냄새 안나는데! 수상해' 따위의 농담을 해가며 길을 걷는데 어디서도 반딧불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덧 길이 좀 무서워지고 여전히 반딧불이라고는 뒷꽁무늬도 보이지 않아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고민하던 때,

-어 저기! 반딧불이!

어떤 분이 찍으신 반딧불이 영상. 실제와는 무지 다르다.

일제히 말을 멈추고 반딧불이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샤워 물줄기 소리를 내는 야트막한 계곡의 위쪽에서 반딧불이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를 홀린듯이 따라가자 산기슭에 족히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반딧불이들이 마법처럼 모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기 눈부신 태양빛에서도 선명한 보름달빛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산사만의 소박한 낭만이 있었다.


즈음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얗게 바랜 구름을 뚫고 옅게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절의 한 버려진 창고 처마 밑에 앉아서 우리를 동그랗게 맴도는 신비로운 반딧불이 한 마리와 함께 별과 반딧불숲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물줄기 소리보다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찌개 냄새나 무서움 같은 건 잊은지 오래였다.


-저게 반딧불이일까요 별일까요?

-반딧불이인 걸로 해요.

-저 여기 누워서 이렇게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어느 시골마을로 수련회 온 거 같지 않아요?

-세상에, 수련회 언젠지 기억도 안난다.

-우리 다음에 또 이렇게 절에서 우연히 만나요.


어둠을 깨고 나온 모든 대화들이 마냥  예뻤다.



3-3 여름비


비가 오는 절은 영험함이 한층 깊어진다. 산등성이마다 구름이 고, 빗소리는 자갈밭을 두두두두 때리고, 처마마다 곧게 물줄기가 떨어지는 게 정말 환상적이다. 소리도, 모양도 어느 것 하나 일정한 것이 없다. 자갈과 산등성이의 생김새와 모든 것들이 인위적인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러워서 눈과 귀가 편안하다.

짧게나마 찍어본 빗소리

템플스테이 숙소는 건물의 ㄴ자 모양 바깥쪽에 2인실 온돌방들이 나란히 붙어있고, 안쪽에 긴 마루복도가 있는 형태였다. 새벽에 반딧불이를 함께 봤던 분들과 산길 산책을 나갔다가 예상보다 일찍 그리고 많이 쏟아지는 폭우에 급히 내려왔다. 용추폭포를 못봐서 아쉬웠지만 물안개가 내려앉아 신비스러운 새벽산행은, 이번에 수업을 들은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걸음걸음마다 어딘지 '별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려와서는 다같이 베개를 들고 복도로 나와서 문들을 활짝 열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잤다. 이 평화로움, 느긋함. 정성들여 그려진 수묵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자연 사이로 아주 조그맣게 인간을 그린, 낮은 채도의 여백이 아름다운 수묵화.

이상범, '귀로' 일부




4. 끝


유럽 여행 때 오르비에토라는 고도시에서 예상치 못한 폭풍우를 만났었다. 우산이 뒤집혀 날아가고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그 와중에 캐리어까지 끌고 울퉁불퉁한 도로를 걸어야 했던 나는 극도로 지쳐있었다. 당시 잠시 비도 피하고 틀어진 일정도 정비할 겸 동네 유일의, 가장 유명하고 아주 독특하게 생긴 성당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온몸으로 비를 뚝뚝 흘리면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뼈까지 울리는 오르간 선율과 조각상이 진열된 성당의 웅장함에 그대로 압도되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주 엄숙한 어떤 ‘체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절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그런 신성한 ‘체험’을 시켜줬다. 유럽에서 만난 성당들이 도시의 중심부에서 하늘을 찌를듯이 높고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면, 절은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그 때의 오르간 소리가 떠올랐던 범종 체험 시간에, 7개의 소원을 빌면서 7번씩 종을 치는데 '아, 이 종소리는 반드시 하늘까지 닿겠구나-' 싶었다.

둥- 둥-

들어왔던 모든 소리 중 가장 위엄 있고 엄중한 소리였다.


스님께서 절만큼은 속세와 정반대로, 누구든 이해받고 포용될 수 있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고 하셨다. 성당과 절에서 치유를 경험했던 나도, 종교가 현대인의 진정한 ‘쉼’을 보장하는 보루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의 조악한 글로나마 낮게 구름 낀 산사의 촉촉한 풀냄새와, 몸통 깊숙이까지 가득 공명하는 종소리를 전해본다. 노트의 어느 글에서처럼, 이 글로 연결된 여러분과 나 또한 몇 천, 몇 억년 간 이어질 인연이기 때문에, 나는 이토록 소중한 여러분들께 오랜만의 휴식이 내게 준 묵직한 위로를 꼭 전해주고 싶다.


힘든 하루를 보냈다면, 숨을 깊게 쉬고, 숨의 박자를 세상이 아닌 나의 박자에 맞춰 보기를, 일상의 아름다움에 감각을 열고 사람 사이를 메우고 있는 온기를 느껴보기를, 그렇게 비워서 충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힘내보기를, 진심으로, 나의 '온 존재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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