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을 보고
언젠가부터 저의 대화들에는 '무서워'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섭고, 보장되지 않은 미래가 무섭고 또 이 나라가 무섭고 주위가 온통 무서운 것들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했습니다. '무서움'이 동력이 됐던 것이죠. 나라에 대한 무서움에 투표를 하고, 이 '브런치'도 또 다른 무서움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서움'이 이런 긍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걷기왕> 속 '만복'이와 '수지'를 보고 있자니, 무서움이라는 동력이 저를 포함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도 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마라톤 유망주였던 '수지'는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더 이상 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수지는 '무서워서'라는 대답만을 남기고 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운동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운동을 그만둔다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수지'를 무섭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부상이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이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야 '수지'는 운동을 그만두게 됩니다. 정말 더 이상은 운동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된 것이죠.
'만복'이는 아이들에게 꿈을 쥐어 주고자 노력하는 담임 선생님 덕분에 경보를 시작하게 됩니다. 전혀 생각도 안 해 본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이 '무섭다'는 '만복'이는 경보를 그만두지 못합니다.
딱히 재능도 없고, 비인기 종목인 경보이지만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찾았다는 안도감이 '만복'이의 '무서움'을 지워줬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노오력'을 시작하지만, 사실 '만복'이라는 이름 외에는 경보에 어울리는 것이 없던 '만복'이는 경기장에서 쓰러지고 나서야 이것만이 답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세 분류로 구분합니다. 승자와 패자 그리고 노력한 자.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지금의 시대는 그래도 노력한 사람만큼은 비록 승부에서는 패했을 지라도 승자와 같은 대접을 해 줍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한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최소한 노력이라도 다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복'이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또 어쩌면 '수지'처럼 그 일을 할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을 끝까지 가지 않아도 느끼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간에 돌아서면 노력한 자도 아닌 패배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버티곤 합니다. 혹은 중간에 돌아섰다 하더라도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며,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경보는 두 발이 모두 지면에서 떨어지면 실격이라는 룰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걷기왕> 속 '만복'이는 시합 중 달리기도 하고, 경기장에 벌렁 드러누워 버리며 그 두 발을 트랙에서 막무가내로 떼 버립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영화는 말합니다. '무서움' 때문에 굳이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그것이든 무엇이든 발 붙이고 있지 말라고요. 룰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발을 붙였다 떼며 걸어가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진 않겠죠. 그래서 '만복'이의 행동이 더욱 용기 있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다치는 게 더 큰 '무서움'이라는 걸 알고, 그걸 동력으로 삼는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