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 - 'Purpose - The 2nd Album' 리뷰
불의 속성은 이중적이다. 일단, 인류 문명이 '불' 에서 촉발되었듯 불은 '탄생, 열정'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로 불은 화려한 타오름 후에 남는 '까만 재', 즉 '소멸, 소각'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불은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속성이 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가까이 하려는 순간 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위에 따뜻한 온정을 주지만 다가서는 순간 상처를 입히는, 홀로 고고히 타오르는 존재가 바로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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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오랜 기간, 많은 음반을 발표한 중견 가수다. 2007년에 소녀시대로 데뷔해서, 네이버 뮤직 기준으로 OST와 싱글앨범 포함 101장 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업물을 발표했다. 소녀시대 때는 메인보컬과 리더로서 팀 전체의 색을 책임졌고, 2015년 10월 첫번째 미니앨범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아티스트의 색깔은 앨범 전체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다고 보기에, 태연이 대중들에게 '아티스트' 로서 각인되기 시작한 시점도 이 때 부터라고 생각한다.
태연은 먼저 I, Rain 등의 팝 발라드, R&B 트랙을 통해 보컬리스트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후의 미니앨범 'Why'와 정규앨범 'My Voice' 에서는 업템포 팝 위주의 트랙을 시도하면서 트렌디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작년에 나온 미니앨범 'Something New' 서는 Mellow 한 컨템포러리 R&B 트랙들을 선보였는데, 중견 가수로서의 여유로움을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단순히 장르적 다양성을 시도하는걸 넘어 음악 차트에서도 굉장한 성적을 보여주면서 '믿고 듣는 가수' 타이틀을 유지중이다.
태연은 단지 음악 차트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월드투어, 피지컬 앨범 판매 등에서도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얻고 있다. My Voice 앨범 같은 경우는 초동 판매량 8만 6천장으로 역대 걸그룹 앨범 초동 판매량 순위 14위에 올랐는데, 이는 레드벨벳의 Reve Festival 시리즈보다도 높은 수치다. 솔로 아티스트임이 무색할 정도로 발군의 상업적 성과를 보여주는 만큼 SM의 푸쉬도 상당하다. 작년 미니앨범 발매 이후 월드 투어를 돌고, 5번의 싱글과 한 번의 미니앨범 발매 (일본 활동)를 했는데, 싱글을 포함하면 후배 아티스트인 엑소나 레드벨벳보다도 컴백 텀이 짧다. 중간에 우울증 증세를 앓는 등 힘든 시기가 있었다는데 소속사가 가수를 혹사시키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다.
'믿고 듣는 가수' 타이틀에 걸맞게 이번 앨범 또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타이틀 곡부터 차근차근 리뷰해 보도록 하겠다.
장르 : Pop, Soul, Alternative R&B
작사 : Kenzie
작곡, 편곡 : Kenzie / Anne Judith Stokke Wik / Ronny Svendsen
Kenzie 가 작사, 작곡, 편곡에 참여했다. 평소 조금 난해하다 싶은 댄스 트랙을 쓰는 작곡가인 만큼 이런 미디움템포 트랙에 참여한 것이 조금 신선하게 느껴진다. Anne Judith Stokke와 Ronny Svendsen 은 유명 프로듀싱 팀 디자인뮤직 (Dsign Music) 소속 작가로 SM을 비롯한 수많은 케이팝 아티스트들과 작업한 이력이 있다.
장르적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Soul Pop 정도로 볼 수 있겠다. 화려한 보컬 멜로디와 웅장하게 깔리는 퍼커션사운드 등 아델(Adele) 등의 팝 디바들의 음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개인적으로 Adele의 'Set Fire to the Rain' 이라는 곡이 떠올랐는데, '불(Fire)' 이라는 키워드를 차용했다는 것과 웅장한 사운드 등 겹치는 요소가 많은 듯 하다.
* 아델 - Set Fire to the Rain
편곡적인 특징은 팜뮤팅 (Palm Muting) 주법으로 연주되는 기타 그리고 몽환적인 코러스 패드이다. 특히 훅 부분의 팜뮤팅으로 연주되는 기타 라인과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에서는 록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타올라라. 불살라라' 등의 도발적인 가사와 잘 어우러진다. 둔탁하게 두드리는 퍼커션 사운드는 웅장함을 형성하고, 양쪽 귀에 깔리는 Ethnic한 코러스 패드는 곡에 이국적인 느낌을 더한다. 또한 훅이 끝나고 짧은 프리-벌스 라인이 존재하는데, 플라멩코 느낌의 흥겨운 클랩 리듬으로 채움으로써 후끈후끈했던 훅의 열기를 산뜻히 식히고 있다.
저번 미니앨범의 타이틀 'Something New' 에서는 절제된 그루브의 미학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타이틀곡에서는 화려한 보컬을 전면으로 내세워 솔로 보컬리스트로서의 존재감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두 곡의 공통점이라면 태연의 평소 생각 (프로듀서들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이나 마인드셋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Something New에서는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며 몰개성화 되가는 세태를 비판했다면, 이번 불티 에서는 '내안의 불씨를 깨워' 등의 가사를 통해 당당히 나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이제는 태연안에 단단한 자아가 자리잡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뮤직비디오는 곡 전체의 분위기에 걸맞게 불꽃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옥상, 노을, 높은 스탠드 위에서 춤추는 댄서 등 전반적으로 '상승' 적인 이미지들이 많이 보인다. 이런 연출이 태연의 강렬한 존재감과 당당한 면모를 부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겹쳐보였던 뮤직비디오는 Cashmere Cat - Trust Nobody. 노을빛 하늘을 배경으로 군무를 추는 댄서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Cashmere Cat - Trust Nobody (feat. Selena Gomez & Tory Lanez)
곡만 들었을 때는 스탠딩 얼론으로 부르는 곡일줄 알았는데 군무가 등장해 좀 놀라웠다. 라이브 무대에서는 중창단을 백 보컬 삼아 오페라같은 무대를 꾸민다면 보컬의 존재감이 더 살지 않을까. 애초에 춤을 추면서 이런 곡의 가창이 가능할지 의문이기도 하다.
어쿠스틱한 편곡을 중심으로 보컬 멜로디를 부각시킨 곡들이 많다. 퍼포먼스보다는 보컬에 무게를 실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1번트랙을 제외하고는 트랙 전반부에는 뜨겁고 화려한 느낌의 곡들을, 후반부에는 차분한 느낌의 곡들을 배치했다.
1. Here I Am
Rain, Voice, Make me love you 등 태연의 앨범에 자주 참여했던 작곡가 Matthwe Tishler 가 참여했다. 주로 R&B, 발라드 트랙을 쓰는데,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활동하기에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한 곡들이 많다. 공동 탑 라이너로 참여한 Allison Kaplan 과는 BTS의 '보조개' 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뮤지컬의 1막 중 서막과 같은 곡으로 오케스트레이션과 일렉기타 사운드로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3. Find Me
Ekko Music 소속 작곡가 Mike Daley가 작편곡에 참여했다. Mitchell Owens, Blanca Blush Atterberry 와는 엑소의 '후폭풍' 에 공동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Mitchell Owens 와는 붙어다니며 SM의 NCT, WayV, 샤이니의 곡들에 참여했다. NCT의 Regular, Boss 등을 작업한 것으로 보아 주로 힙합, EDM Trap 등이 주 장르인 듯 한데, 이번 Find Me 는 미디움템포의 팝 장르다. 불티와 비슷한 바이브의 곡으로 불티의 뜨거운 느낌을 유지하고자 바로 다음 트랙으로 배치한 듯 하다.
4. Love You Like Crazy
Kenzie와 런던 노이즈가 참여한 곡. 불티, Find Me 에 이어 시원한 발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5. 하하하 (LOL)
더 블랙 레이블 소속이었다가 아티스트와 작곡가 모두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 'Dress' 가 작곡에 참여했다. 더 블랙 레이블을 나온 후 SM 가수와의 작업이 유독 잦은 것 보니 아마 YG와의 음악적 방향성이 맞지 않아 나오지 않았을까. 몽환적인 힙합/ PB R&B 에 특화된 작곡가인만큼 태연에게도 그런 느낌의 음악을 만들어주었다. 앨범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특이한 느낌의 곡이 아닌가 싶다. 빌드업을 시킨 뒤 하.하.하 하고 힘없이 읊조리는 훅이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다. 이어서 강렬한 브라스 사운드가 등장하는데 케이팝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구성이라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다. 태연이 아니면 소화할 가수가 없었을 듯.
6. Better Babe
히치하이커가 참여한 블루스 록 (Blues Rock) 장르의 곡. 차가운 금속성 질감의 일렉기타 리듬이 인상적이다. 절규하는 태연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들린다. 개인적으로 수록곡 탑 3안에 드는 곡이라 생각한다.
7. Wine
태연이 자주 보여주었던 Slow Jam R&B 장르의 곡이다. The Magic of Christmas Time에서 만났던 Robin Ghosh 가 작편곡에 참여했다.
8. Do you love me
달콤한 재즈 발라드 곡. 노래를 들으면서 이주형 작곡가가 쓰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태연의 When I was young, 레드 벨벳의 달빛 소리 등 수많은 재즈 발라드 넘버들을 작곡한 작곡가이다. 이주형 작곡가는 전형적이지 않지만 세련된 화성 진행을 참 잘 만들어낸다. 이 곡에서도 화려한 화성 진행으로 재지한 느낌을 잘 살렸으나, 쉽게 꽂히는 멜로디를 활용함으로써 대중성또한 잃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브러쉬 연주와 잔잔히 깔리는 스트링 연주도 일품이다. 수록곡 중 넘버 1으로 꼽고 싶은 곡으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두고두고 들을 생각이다.
9. City Love
Find Me에서 만났던 Mike, Mitchell 듀오와 지소울, 태연, 정기고 등의 작업을 한 Realmee 작곡가가 참여했다. 쿵빡 비트 사이 예상치 못한 자리마다 드럼 필인을 집어넣었는데, 곡 전체의 무드를 적절히 펑키하게 만들어준다.
10. Gravity
느린 템포의 팝 발라드 곡. 태연의 따뜻한 보컬이 잘 드러나는 곡이다. 역시 아델 등의 팝 디바들의 앨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었던 스타일이다.
11. Blue
피아노 하나로 연출한 단출한 발라드 곡. 선 발매 싱글앨범에 실린 첫번째 트랙이다.
12. 사계
봄에 발매되었던 선 공개 싱글.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해 클래시컬한 무드를 살렸다. 마치 비발디의 사계가 연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