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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ug 22. 2016

인간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0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가슴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타자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존재로서 비참함을 받아들이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때
신들의 궁전에도 깃들지 않는 참된 신성이 우리에게 깃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 존재 스스로를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존재자의 욕망 자체가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대로는 인간의 기쁨이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낙으로 이 험난한 세상,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욕망을 억압하고 그것이 인간의 것이 아닌 양 부정할 때 욕망은 인간에게 위선의 가면을 쓰게 하고 범죄의 충동으로 내몰리게 된다. 인간 존재에게 있어 부끄러운 것은 바로 이렇게 저질러지는 위선과 범죄이다.


한 인간 개인에 의한 범죄도 죄악이지만 국가 체제라는 집단에 의한 범죄는 악 그 자체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억압과 부정이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매우 흔한 일이라면 그 집단이나 사회는 매우 위험한 광기를 향해 폭주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존재는 육체를 가졌으므로 욕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의 억압과 부정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또 다른 폭력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욕망에 대한 억압과 부정을 통해 위선적 존재를 만들어 내고 그 위선적인 존재의 특별함과 동시대의 불행을 결부시킨다면 대중들은 어떠한 메시아적 인간의,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영웅적 지도력, 초인적 인생관을 통해 그의 잔혹성과 야만을 미화하고 포장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개구리에게는 황새가 아닌 개구리가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상화를 통해 탄생한 권력자는 언제나 잔인하다. 실제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특별함에서 비롯되는 지도력이 평범한 인간 존재를 위한 것일 리가 없고 보편적 인간을 위한 능력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초인적인 지도력은 모든 범인을 향해 초인적 강압을 하게 마련이고 모든 범인이 초인적 노력을 할 때 인간 존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가장 나태한 게으름과 천박한 무지와 권력의 허세 속에서 의미가 있건 말건 책임을 지건 말건 지껄여대기만 할 것이다.


자신만은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존재자 하나 하나는 모두가 특별하다—이 굳어진 인간의 영웅화나 우상화는 결국 한낱 비참한 존재인 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물론, 전지전능한 신보다 더 전지전능한 인간으로 신격화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신의 신성이 그 지배자의 하수인이 되어도 초라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의 지배욕을 위해 신마저도 마음대로 창조하고 소유하며 스스로 신화가 되어 위대한 초월적 인간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영웅적인 저급함은 동시대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인간의 보편가치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파괴하고 만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자의 삶마저도 말이다.


권력 위에서 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해 고상한 품위를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고상한 척하는 천박함보다 위선적인 것은 없다는 것과 믿음이란 신을 위한 인간의 것이지 신격화된 천박한 인간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고상한 척하는 위선 뒤에서 우상화된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지배자를우리는 지금 분명히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을 위한 참된 믿음은 겸손하고 보편적이며 선량한 인간 존재들을 같이 더불어 살아가게 한다. 신격화된 권력자를 위한 맹신은 지배를 위한 집단 광란, 즉 악을 탄생시키고 세상을 파멸의 벼랑으로 내몰게 된다. 신격화된 인간, 우상화된 인간에게 인간 존재의 존엄성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가슴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타자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존재자로서 한정된 시간의 인생을,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한정된 존재’의 의미가 비록 존재자들을 현실 앞에서 좌절하게 만들고 초라하고 비루하게 보이게 만들지언정 인간 존재로서 비참함을 받아들이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때 신들의 궁전에도 깃들지 않는 참된 신성이 우리에게 깃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 존재 스스로를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유한하며 비참하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오류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이 유한한 소멸성에 의해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오류와 한계가 없는 사상은 위선이거나 거짓이거나 악 그 자체이다.


나는 밤에 떠나기를 좋아한다. 밤에 펼쳐지는 어둠은 희미한 모든 것들을 매우 선명한 극단의 지표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희미한 모든 것들 속에서 한쪽은 혼돈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쪽으로는 방황이라고 새겨진 이정표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이정표 앞에 서 있다.


혼란의 방향이 두렵다.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광기, 광란의 칼이 되어 인간 존재의 이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다름 아닌 언론이라는 것에 의해서 말이다. 인간의 사상이 미신적이고 광기 어린 이념에 의해 양심을 해부하는 언론이라는 실험대 위에서 쏟는 피여야 하는 세상에서 혼란의 늪으로 향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유의 신대륙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자유롭지 않은 것이 인간 존재의 이상으로부터 사상의 가면을 쓰고 태어나 이념이라는 광란의 칼부림으로 체계를 선동하고 있다. 이것이 시대의 불행인 집단 광기의 전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


지혜와 광기를 구분하기란 정말 어렵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광기의 눈에 지혜는 사악한 교설이고 지혜의 눈에 광기는 신의 정의나 진리와 같은 순리에 의해 정화될 듯 보이는 잠시의 재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차이의 유사점으로 인해 무엇보다 힘과 무지의 무리 앞에 지혜는 너무 쉽게 단죄되어 왔고 광기는 너무 쉽게 또한 너무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히틀러와 싸웠던 스탈린이 그와 얼마나 달랐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마치 스탈린이 그의 반대파를 숙청하며 풍기던 피비린내에 광분하듯 지금 현재 우리 사회 체제, 국가 체계는 정치적 집권 세력과 공동 운명 체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의식 사태는 집권자와 국가 체계 자체를 동일체화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그리고 집권자에 대항하는 반대파들을 반동이라 낙인 찍고 그들을 몰아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왜곡된 애국이라는 광기의 정체이다. 이러한 집단 광기에 의해 지혜는 언제나 비극을 맞이해야 했으며 참된 사상은 당대에 성공한 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애국이란 사악한 자들의 미덕>1이라는 말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 나는 종종 번민한다.


혼란은 곧 두려움을 야기한다. 그리고 혼자 생각한다. 나는 혼란의 대양에서 평화로운 사상의 신대륙을 찾듯 떠돌아다니는 여행자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라는 낯선 말을 가슴에 붙이고 항상 새로운 세상의 삶을 찾아서 그 설익고 낯선 삶과 더불어 자신을 찾아 떠도는 그런 미숙한 개체의 존재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이란 살아가고 나면 과거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엮어진 기억들의 조합이 아니다. 삶이란 순간순간의 낯선 시간 사이에서 고통과 희열과 만남 사이에서 떨리는 손길이 닿기도 하고 그런 존재자와 존재자의 어울림, 기댐과 받아들임이라는 터에서 피어나는, 인간 존재의 관계에 의해 엮어지고 이루어져 나가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삶이란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관계성의 시간이며 과정이다. 삶은 매우 복잡하다. 누가 인간의 삶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매 순간 치밀한 분별을 필요로 할 만큼 복잡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뚜렷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그렇다는 식의 무기력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정치는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면서 한낱 인간의 족벌을 우상화하는 악덕으로 전락했다. 교육은 고유하고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고 피지배자로서의 관념을 주입하여 집단의 틀에 가두는 이수학점으로 변질되었다. 사회 체제의 몰가치는 그것을 바탕으로 바벨탑보다 높은 수직 서열을 쌓아 올려 존재자들을 끊임없는 위화감과 박탈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악덕의 사회로부터 탈출하지도 그 폭력에 저항하지도 못한 채 그저 새로운 행선지를 찾아 나는 떠돌아다닐 뿐이다. 쓰라린 이 순간, 그 무엇으로도 얽어맬 수 없는 자유로운 사상들이 나를 향해, 내 가진 고유한 본성과 직관을 향해 악덕의 목마른 사막으로부터 가치와 생명이 넘실거리는 신들의 대양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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