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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ug 19. 2016

인간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9

인간은 겨우 그러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회의에 대한 염증은 우리 자신을 과연 인간다운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인간다운 존재로 성숙시킬 수 있는
소중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그가 살아간 세월만큼 성숙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인간 존재를 단 한 번도 노예로 대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신은 언제나 인간을 연인처럼 벗처럼 아들, 딸처럼 대해왔다. 뿐만 아니라 신은 인간을 노예의 삶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 그런데 인간 존재는 신 앞에서는 물론 이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조차 노예처럼 존재해 왔다. 스스로 그랬을까. 단연코 아니라고 장담한다.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자들에 의해 힘을 빼앗기고 그들에 의해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거기에는 추상적인 정치권력 이전에 먹고 생존해야만 하는 동물적 존재의 절박함이 먼저 있었다. 지배자들은 먹고사는 기본인 식량을 ‘신에 대한 봉헌’의 명목으로 부족을 이룬 인민에게 생산, 헌신, 헌납하게 하고 이를 관리하는 형태로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의 대리자들은 신으로부터 혹은 선조로부터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것처럼 혹세무민을 일삼았다. 그 특별한 권능이라는 것은 것의 전부가 폭력을 통한 압제, 기만하고 착취하는 능력일 뿐이었음에도 이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 나는 신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모세라는 인간이 신을 보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인간 중에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신을 보았다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의 현실성’을 존재 자체처럼 믿고 있다. 다시 말해 신이 정말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말했다.


신성에 대한 믿음은 종교를 떠나 모든 인간 존재의 의식과 무의식에 내재된 제거가 거의 불가능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존재자의 신에 대한 믿음이며 또한 이것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문제이다. 비참하고 연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의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다.



나의 믿음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나의 이해가 반드시 믿음에 의해서 비롯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지금부터 앞으로 펼쳐질 나 자신의 삶을 통해 알아볼 일이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유의지라는 신이 인간 존재에게 부여한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인간의 소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거의 절대적 믿음이 소명이라는 형태로 부여될 수 있는가. 앞서 나는 인간에 의해 인간 존재에게 부여된 인간의 소명에 의혹과 회의를 표시했다. 인간은 존재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하는 회의적 의문은 거의 조롱과 비아냥에 그쳐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존재자 앞에서 인간 존재는 타자로서 한낱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 중에는 자신이 매우 특별한 존재자라는 우월감이나 사명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러한 사명감 혹은 우월감에 빠지게 된 것은 그것의 천박함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큼 인간적인 번민과 비참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 인간은 그가 타인 타자에 대해 근본적인 불안과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과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내면 성찰의 체험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부류의 인간 존재들이 갖게 되는 사명감이나 우월감은 그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존재감의 추구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실상 그것은 힘과 완력에 근거한 일방적이며 미개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는 미숙한 존재자임을 스스로 입증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미숙한 실체에 대한 증명을 자기 자신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집단화, 조직화되고 집단의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될 때 돌이킬 수 없는 파괴적 힘을 향해 상승하게 된다는 경계심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꼭 물리력의 꼴을 갖추고 있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맹목적 광기를 형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성찰도 없다. 이렇게 인간의 황폐화된 의식은, 인간 존재의 이성적 의식의 부재는 인간 사회 자체를 얼마든지 야만적 광란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종종 자신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 지배할 수 있는 특별한 어떤 능력이 있거나 그러한 사람을 추종하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사회 공동 체제의 어떠한 규칙, 규율도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만 있을 뿐이라는 절대적 믿음과 광기에 사로잡혀 그들을 우상으로서 추종할 뿐이다.


존재자가 인간인 이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란 겨우 그러한 존재인가 하는 염증과 함께 인간 존재에 대해 회의할 때가 있다. 나는 그 회의를 매우 강력하게 긍정한다.


인간은 겨우 그러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회의에 대한 염증은 우리 자신을 과연 인간다운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인간다운 존재로 성숙시킬 수 있는 소중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코 그가 살아간 세월만큼 성숙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것일 때에만 거룩함이든 선량함이든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인간들이 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악덕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현실적 선택일 뿐 그 자체로는 절대 악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는 괴이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기도 하다. 반대로 거룩함이나 선량함이 타인의 것일 때 짜증스럽고 위선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들은 이러한 폭력적 이기심에 의해 극단적 원리주의를 만들어 내고 이 원리주의를 중심으로 미신적 이념을 설파하려 한다. 존재자의 사상으로부터 탄생하는 사유의 이념이 아니라 종파와 같은 교조적 믿음의 이념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광기와 같은 믿음을 인간의 의식에 주입시키기 위해 ‘국가’라는 사회 체제를, ‘민족’이라는 부족을 신앙과 같은 절대적 대상으로 변질, 왜곡시키기도 한다.


인간이 탄생하고 타자와 집단을 이루며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회 체제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속하지 않는 우리가 아닌 타자들의 사회 체제나 국가 체계는 배척과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가 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비극들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음은 굳이 세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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