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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ug 24. 2016

삶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1

...불행과 비극의 암흑 속에서 우리가
사랑한다는 의미의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타자에게서 단 한 인간 존재만을 위한 빛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삶은 비극인 것이다...



삶은 잔인하다. 도무지 스스로가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길이 없다. 각박한 세계가 삶을 점점 더 잔인하고 가혹하게 만들고 있다. 내다 버린 쓰레기처럼 팽개쳐진 인간의 존엄이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곳에서 이것을 복된 삶이라 불러야 하는, 미래의 낙관을 강요당하는, 그래서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짐 지우는 이 세계는 생존만을 위한 참으로 잔혹한 야만의 생태계가 아닐 수 없다.


제일 먼저 허영을 벗기고 어리석음 다음으로 비굴하고 추잡스러운 간사함을 벗기고 나면 결국 무지와 무식밖에 남지 않는 인간들 앞에서 좀 더 고상한 말을 하고 교양 있는 인간이 되도록 강요하는 세계만큼 더 잔인한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세계는 우리를 좀 더 고결한 인품을 가진 존재가 되도록, 좀 더 위신 있는 행세를 하는 인간이 되도록 몰아넣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 허세를 통해 좀 더 안락한, 그러나 생각을 상실한 골빈 소리통으로 살아가도록 내몰고 있다. 그리하여 은밀한 쾌감이 배가되고 허영과 위선의 삶을 추구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식하는 고유한 존재자라면 누구나 회의와 염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가치의 상실과 심각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치명적인 원인에 대해 아무런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것에 비해 알 수 없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치명적이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과 그것을 해부하고 그 사태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의 시도조차 어렵다는 무기력에 온통 지배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패배감 속에서 허영과 허세가 판을 치는 광란의 문턱에서 나 역시 이러한 무리의 일부가 되어 서성이며 배회하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언가를 궁리하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삶이란 이렇게 아찔할 만큼 잔인하다. 허영과 허세에 의존하지 않고서 우리는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대부분 사회가 강요하는 짝짓기를 해야만 하는 허덕이는 인간, 한 마리 사회적 짐승으로서 인간과 교미하도록 관계 지어졌을 뿐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의 삶에서 사랑이란 한 인간이 타자라는 고유한 별을 향해 애태우고 빛나는 영혼의 부름,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무감각의 불행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바로 이 집단 의식의 일부로 매몰되어가고 있다.


비극이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불행과 비극의 암흑 속에서 우리가 사랑한다는 의미의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타자에게서 단 한 인간 존재만을 위한 빛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삶은 비극인 것이다. 결국 어둠 속에서 홀로 사랑한다 외치다가 한순간의 빛마저 보지 못하고서 사랑했다가 체념하게 하는 무기력이 현재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불행의 연속이 인간의 사랑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사랑, 영혼과 영혼이 교감하는 순수는 현대 사회의 가치 몰락과 함께 가장 비극적인 비현실성으로 왜곡되고 있다. 진정 누가 누군가를 사랑했었단 말인가. 그 사랑이 가져다준 것은 인간의 비참뿐이었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인류가 아닌 사회 지위의 꼬리표를 부착한 한 마리 짐승과 짐승으로서 짝짓기에 충실한 사회적인 암컷과 수컷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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