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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ug 31. 2016

삶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2

허영으로 인간 존재의 지성을 채울 수도 없을 것이고,
거짓으로 사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랑한다고 했던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무엇 때문에 사랑했었단 말인가. 그것은 꿈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었으며 아무리 쫓아가도 다가갈 수 없는 환영의 평원이었다. 그 향기를 잊을 수 없는 인간 존재는 과연 몇이나 남았을까.


어쩌다 향수에 잠겼다 깨어나는 사람들의 허탈한 미소를 본 적이 있는가. 꿈꾸는 듯한 사람들의 창백한 평화. 그 얼굴에서 우리는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존재자의 모든 것이 어떻게 지워져가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이제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무기력의 관성을 따라 어쩔 수 없어 하며, 어쩔 수 없이 만나고,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므로 살아간다. 존재자와 타자가 마주치는, 사람을 만난다는 삶이라는 향기는 이제 조금의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삶은 비극이다. 젊음을 착취하고 그 피눈물로 배를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삶이란 비극 이상의 비극이다. 만에 하나 한 젊음이 성공을 쟁취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비극을 조장한 연출자들 외에 누가 이 삶을 보며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주인공도 조연도 단역도 모두 이 비극의 참혹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무대는 여전히 쓸쓸하고 배우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정당하지 못한 기득권이라는 연출자들이 이들을 더욱 참혹한 비극으로 내몰수록 부당한 기득권과 빈곤한 자신이 일체화된 듯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방관자들은 열광하고 이 비극이 참혹할수록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는 부정한 기득권자들은 새로운 젊음이 피어나지 못하도록 세상을 짓밟는 변태적 희열에 도취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 존재의 꿈이 착취당하고 있다. 존재자의 순수가 더렵혀지고 있다. 인간 존재의 열정은 쾌락의 볼모가 되었고 재능은 헐값에 팔린다. 이 절박한 비극에 대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무기력의 조류를 따라 그저 방황하거나 방관하기만 한다.


현대의 인간 존재는 젊음을 상실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실의 고통조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누구도 슬퍼하거나 절규하지 않는 무대에서 인간 존재의 사회는 ‘우리’가 아니라 ‘나’와 ‘너’로 해체되어 분리되고 멀어지며 마침내 격리된다. 이렇게 격리된 존재자 하나하나의 고통은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곳에 내버려지고 있다. 인간 존재는 이제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하고 생존해야만 한다.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이 비극 앞에서 환호하는 물질과 힘과 맹목의 승리가 현혹하는 희망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 것인지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회의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물질과 힘과 성공 신화를 우상화하기 위한 맹목이 학살한 순수의 의미들을, 인간을 위한 삶의 가치들을 상실한 공허한 폐허 속에서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상실이라는 아픔이 비움의 시간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막연한 의구심을 절박한 희망의 지표로 삼아야만 한다. 전체로서의 삶의 과정 안에 있는 사랑도 비극이며 성공도 비극이며 당장 숨통이 막힐 듯한 오늘 또한 비극의 시간일 뿐이다.


소수의 일부가 절대적인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 ‘삶’이라는 말에는 원치 않는 곳으로 내몰리는 궁색한 운명이라는 불행한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미지와 허상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에는 ‘행복을 가장한 인간의 진실을 저버린 거짓된 창녀들의 미소’라는 끔찍한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러한 비극 속을 살아가고 있다. 존재자들은 이 비극의 무대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있다. 상실과 절망과 박탈 뒤에는 본능적 생존만이 분노와 증오처럼 눈을 번뜩이며 겨우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빈곤한 존재자들의 때 묻은 마음에 필요한 것은 풍요도, 예술도, 교양도, 종교도 아니다. 어떠한 냉소와 모멸감에도 상처 입지 않고 식어버리지 않는 따스한 한 줌의 온기가 필요하다.


존재자의 순수는 빈곤한 세대의 허기진 욕망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허영으로 인간 존재의 지성을 채울 수도 없을 것이고, 거짓으로 사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와 회의에 비해 측정할 수는 없으나 매우 미미한 적은 부피와 밀도와 질량만의 이유로도 나는 인간 존재의 참혹한 삶이 비극의 연속으로만 결론 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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