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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ug 28. 2021

인문주의의 부재

사소한 인문학 이야기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아첨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문학>에 열광하며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한 권의 <인문학> 서적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타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쓴소리를 잘 하고 또 그 쓴소리를 잘 듣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쓴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도, 유감스럽게도 그런 지적 능력도 없는 것이 우리가 외치는 <인문학>의 현실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에도, 근대에도, 현대에도, 사실 인문주의가 부흥했다는 증거는 별로 많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는 몇몇 유명인들의 저서들? 글쎄다! 그 저서들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사람 중심의 인문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신학에 저항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이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사실 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그 어떤 인문주의보다 더 인간적인 눈길로 인간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르네상스는 시대적 유행의 하나였으며, 본질적으로 <신 중심>의 세계관에 저항한 <인간 중심> 세계관의 권력 다툼이었다.


사람들에게 불편한 이야기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인문학적인 지위를 얻기 어렵다. 다시 말해, 인문학이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 하는 것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마치 종교가 타락했던 시대에 신학이 성직자라는 특권층에 아첨해야만 신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듯이.


인문주의,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먼저 인간의 관념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 관념의 세계는 도무지 추상적이어서 여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추상적인 언어,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구조의 논리를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언어가 아무리 정교하고, 인간의 혼을 담고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의 맥락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혹은 이러한 추상은 사상적인 언어로 드러나 하나의 명제를 형성하게 되기도 한다.


예술은 이런 점에 있어서 인간의 창조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혀 다를 것 같은 예술은 가장 구체적인 철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혹은 철학을 담을 수 없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거나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헤프게, 그래서 추할 정도로 <인문주의, 인문학>을 입에 담고 산다. 그 모든 것이 인간에 아첨하기 위한 상술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니, 잘 알고 있기에 그 상술에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팔기 위한 상술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글쎄. 인간을 팔기 위한, 인간의 몸값을 위한 상술이라면 어떨까?


인문주의의 타락이, 종교의 타락이 그러했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인문학, 인문주의에 열광하는 이 세태에 분명하게 목격한 <인문주의 부재>라는 현실을 목격해야 하는 인문주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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