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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Sep 22. 2016

광기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8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을 근본 속성으로 타고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이다...
특별해지는 것도 위대해지는 것도 인간 존재의 본질적 소명은 아닌 것이다.




인류는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문명은 인간의 정신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갔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했다는 근거는 충분한가 라는 물음은 그렇다면 무엇이—그것이 인간의 이성을 포함한 정신세계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했는가 라고 묻게 된다. 이 물음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문명의 진보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한 원인이었는가. 그리고 이 욕망은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또한 이 발전된 새로운 문명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의혹으로 순환하게 만든다.


나는 우선 문명의 발전을 이루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어떠한 부류였는가 하는데 관심을 가져 보았다. 문명이라는 결과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느 세력이 주도를 했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인류는 진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치면서 한쪽은 보편적 공감대를 이루고 찬사와 존경을 한쪽은 재앙을 불러오고 비난을 받았다. 물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말이다. 


왜 이렇게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는지 뚜렷한 근거와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역사가들이 이렇게 단편화시켰기 때문에 이들 세력에 의한 대립과 갈등을 통해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문명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발전해왔고 세력과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통해 역사라는 것을 엮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역사 속에서 만나는 지배자라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광기의 연속을 기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를 자신을 초인적인 존재로 만드는 무대로 인식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기 위해 그 어떤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행태였다. 그들은 야망이라는 광란에 휩싸인 지배자를 추앙했으며 그들의 시대에 이러한 영웅이 없음을 한탄했다. 영웅 망상에 도취된 지배자가 나타났을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그 영웅을 추종하는 또 다른 세력에 의해 제일 먼저 처단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영웅을 찬양했을 것이다. 광기다. 이러한 광기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움을 대신 앞세울 수 있는 존재가 영웅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자기 감정의 움직임이 곧 세계의 정의 잣대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다수가 그를 지지할 경우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을 때에는 어김없이 전쟁이 일어났고 아이들과 여성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으면 그들은 법과 권력의 이름으로 이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죽이며 짓밟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미움의 이유를 찾아냈고 만들어냈다. 이 이유는 여전히 버젓이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인간이 인간을 미워하는 데에는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기 때문에 그 미움의 이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인에게, 사회에게, 국가에게 그리고 혈통을 이어받은 민족에게 아무런 근거없는 궤변으로 멍에를 씌우는 것이다. 


인간의 미움은 일종의 결과적 감정이다. 모든 감정은 행동, 행위의 동기가 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감정의 모습들과 그 감정 자체의 움직임은 각기 다르다. 미움이라는 감정의 모습이 미움에서 다른 감정의 모습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변화의 크기가 적은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미움은 더욱 미워하거나 덜 미워하거나 미워하는 모습이 달라질 뿐 그 자체가 다른 감정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미움은 대상이 변하거나 그 감정을 품은 주체가 노쇠하여 지칠 때까지 가장 끈질기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증폭하는 감정의 일종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주장에 대해 다른 심층적인 과학적 결과에 따른 이론이 있다면 그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매우 주관적인 개인의 관찰과 단편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도 않고 이론적인 체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기 때문에 주관적 관념의 세계에서 제한 없는 하나의 전제로 삼아보는 것이다. 


즉, 이 광기의 전제이며 수단인 미움이라는 것은 매우 극단적 맹목과 편협한 사고의 표출 형태를 가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집단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이 우상화하고 싶어 하는 지배자가 이러한 극단적 감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매몰되어 있다는 것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를 앞세운 광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를 추종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결론적 감정인 미움이 적개심의 형태로 집단화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내가 미움을 걸론적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사랑하면서 그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미움으로 변한 경우도 있었고 즐거운 일이 다른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즐겁기는 커녕 오히려 불행한 일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감정들은 하나의 결론이었으면서 동시에 다른 감정의 원인이 되거나 다른 감정으로 완전히 전이되어 움직여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움에 미움이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것 외에는 미움이 미움 이외의 사랑이나 기쁨의 감정의 원인이 된 경험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마치 미움이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거짓 행세를 한 적은 있었으나 사실 그 미움이 나를 파괴하는 괴로움과 고통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애써 그 미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결코 하나의 다른 면—많은 사람들이 애써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미화하기 위해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한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불행 자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은 이러한 감정을 가진 그리고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 존재들이 일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독선적인 지배자가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을 망각하거나 혹은 초월적 인간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다. 적어도 자신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존재이며 역사에 새겨질 자신의 이름이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한다.



어느 나라의 전쟁광이었던 지배자는 자신의 이름이 한 척의 배에 새겨지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1 어느 나라의 지배자는 집권 초기부터 집권 말기의 증세를 보이면서 끊임없이 왜곡된 역사 인식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지율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이 선언했던 확신을 표면적으로 철회했다.2 이 두 지배자를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스스로 과연 정통성이 있는 존경 받는 지도자인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위인인가 하는  데에만 더 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나라에서 그들의 부모 세대에도 영웅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에 기록될 ‘위인’이 되기 위해 약자의 삶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의 자녀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이러한 만행을 역사의 발전을 위한 불가피하거나 당연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그리고 위업으로 기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일은 두 나라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며 이런 지배자들은 역사들 통틀어 비일비재하게 많았다.


니체가 말했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간은 보통 악한 인간이다. 그것이 그가 자신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결국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조차 견딜 능력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자기 도취에 빠진 악한이 몹시 나쁜 사람이라고, 악이라고 낙인을 찍었다면 그 상대는 오히려 아주 선량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적어도 그가 규정하는 그대로 인식하기 보다는 직접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어떤 결론을 내려도 되지 않을까. 왜 굳이 그런 지배자의 규정에 최면이 걸려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적개심을 품고 있는 그 동안, 스스로 정의라거나 진리의 편에 있다는 환각 상태에 있는 동안, 당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지배자의 부속품이며 집단 광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불가능하겠지만 한시바삐 그런 인간류들이 평범으로 회귀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영웅과 천재들이 넘쳐나고 이 넘쳐나는 악한들에게 환호하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야흐로 개구리의 세상에 황새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황새가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구리를 잡아먹어야만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도도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의 대중은 자신들이 개구리의 처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거나 부정하거나 아예 자신에 대해 인식 자체를 못하고 있다.


지배자들은 문명의 바탕에 도덕에 입각한 법전—그러나 윤리의 최소한이 법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시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세계의 법률들은 윤리관에 입각한 법논리보다는 이익을 우선하는 법체계를 더욱 선호하는 것 같다—을 펼치기도 했다. 도덕이란 지배자를 위해 절대 폭력을 고상한 언어들로 포장한 우아한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인류의 덕목으로서 가치의 보편성을 지배자들에게 들이댄다면 그들은 가장 추악한 패륜아들일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그의 무지와 천박함, 추악함을 보지 않기 위해 그 보편성의 잣대를 회피하는 기만의 수단으로 한쪽에는 도덕을, 다른 한쪽에는 위업의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윤리가 부족할 때는 위업으로 대중의 눈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열망하는 문명의 진보는 일면 인간 내면에 잘 정돈된 듯한 무생물의 광장과도 같다. 물질 숭배자들은 그 광장에서 광기에 환호하며 기꺼이 살육의 공범자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 공범자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할 만큼 나는 현재 세계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엄한 인간의 보편 가치가 실종된 정통성이 부재한 문명의 발전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의한 인간성 파괴의 과정이 먼저 정당화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부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교활한, 인간의 이성을 물질과 야만으로 타락시키는 세대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부조리를 특정 세력이나 지배자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의 범죄이지 특정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요구와 협력 없이 지배자는 결코 탄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범죄자에 대한 대중의 경멸은 범죄자가 갖는 의도된 범의에 대한 자신의 부도덕과 무의식적인 범의 투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범죄자를 경멸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그 범죄 무게만큼의 부정한 가치를 자신의 존재 내면에 충분히 지니고 있다. 또한 자신의 삶에서 유사한 가해 체험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의 경멸 속에는 이미 저질러진 범죄와 동일한 무게의 범의가 확정되어 은밀하게 내포되어 있다. 마치 경멸과 비난이 자신의 순결을 입증하는 것인 양 행동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 범죄자의 범의와 동일한 부정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요구에 의해 등장한 지배자의 범죄는 곧 대중 자신들의 범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언제나 지배자 하나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범죄 증거를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배자의 등장 역시 대중의 집단 광기에 의한 환호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의 몰락 역시 집단 광기의 분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치 권력에 대해 한 번쯤이라도 생각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문명의 진보를 욕망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욕망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또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이 성찰은 의식의 진보를 통해 물질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만일 세계가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물질 문명의 성장만을 위해 무차별적인 파괴가 벌어질 것이고 그 파괴된 잔해에 인간이 묻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찰은 문명의 진보가 인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문명의 진보를 위한 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문명의 진보를 위해 의식의 진보를 욕망하는 그런 열정이 필요하다.


‘나는 원한다’는 원의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는 성취 의욕에 이르기까지, 이 희망들이 타자의 삶을 파괴하는 지극히 이기적이며 ‘악’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나는 원한다’는 욕망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 가장 환상적인, 동시에 가장 사악한 미신의 근원이 될 뿐이다. 나는 ‘문명의 발전 혹은 진보’의 이면이나 전면에서 인류를 부추긴 욕망의 선동이 종교도 과학도 인간 자신의 이성도 미신으로 전락시키는 맹목적 광기에 사로잡힌 ‘악’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를 이용하기 위해 자유며 정의며 평화라는 인류의 온갖 미덕을 앞세운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광란의 지배자들 거의 모두가 이러한 인간의 보편 가치이며 인류의 미덕을 제일 사랑했을 것이다.



인간 존재는 힘을 가진, 권력을 쟁취한 인간 군상의 도구가 되지 않을 자연적 권리가 있다. 그가 문명의 발전을 이루고자 한다고 해서 보편 인간 존재들이 그의 들러리가 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존엄한 가치를 권력자들의 천박한 선동으로 짓밟을 수는 없다. 그리고 존재한다는 가치 자체가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보편 가치 자체 만큼 인류를 가장 인류답게 진보시켜 온 동력은 아직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단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 존엄에 대한 의식과 의지는 인간이 지배자의 노예였을 때 인간으로서 저항하게 했고 해방하게 했고 인간 모두를 평등하게 했다. 그 평등으로부터의 의지가 인간의 욕망을 진솔하게 인정하도록 일깨워 주었고 문명의 역사 곳곳에 인간 본위의 인식 기둥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만일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희생이 굳이 필요하다면 단언컨대 개발을 앞세우면서 미신적인 선동을 통해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소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희생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소수의 그들이 생각하고 늘 주장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정당한 요구인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명제에 대해 효율과 생산성을 위한 가장 정당하며 가장 정의로운 논리적 방법이다. 그들의 논리와 입장을 존중하더라도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한 가치에 대한 나의 의지를 고수하더라도 이는 늘 같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보편성 앞에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명제의 논리적 미덕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성적 인식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냉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목적을 위대하고 고결한 명제처럼 확신하면서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희생시키려는 천박하고 맹목적인 인간은 많다. 더구나 권력에 천착하는 인간들의 무리에는 더욱 많다. 


무리 진 인간집단의 양심은 둔하거나 악하다. 무리 지어 세상을 향해 발악하는 것은 광기의 전조에 불과하다. 그것이 선동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파괴해서라도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나 이 파괴를 통해서 어떠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자신이 그 소수의 무리에 속한다고 믿고 광란에 날뛰지만 그는 그 소수를 위한 개떼 무리 중 한 마리일 뿐이다. 결국 그 개떼의 무리들은 다시 소수의 무리에 들 수 있다는 미신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 물어뜯게 된다. 이렇게 무리 진 맹목의 선동은 피비린내 풍기는 소수의 무리를 위한 잔치일 뿐인 것이다.



피비린내가, 광기의 피비린내가 술잔을 스친다. 그리고 속삭인다. 눈을 떠라. 생각하라. 별을 보며 외쳤던 태초의 인간 원형으로부터 구원을 열망하는 인간 원형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중복되지 않으나 역사는 늘 반복되었고, 인간은 모두 달랐으나 그들의 고통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침이 밝아 오는 새벽의 슬픔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내 등 뒤에 도사린 인간들의 광기를 느끼면서 불안한 그리고 동시에 평화로운 수면을 동경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나를 전율케 하는 이 두려움이 내가 살아가는 현재 세계에서 하루 빨리 사라지기를 열망하고 있다.


나는 한 번 더 호소하고 싶다. 연약한 인간이 강력한 힘을 추구하게 될 때, 자신의 삶에 내재한 결핍을 그것으로 채우려 할 때, 인간은 악한 존재가 되거나 악에 부역하는 자아를 상실한 도구가 돼버린다. 그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힘으로 대체되었으므로 그 양심 없는 힘이 원하는 바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반면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내재한 결핍을 한 인간의 삶으로 채우려 할 때 그는 존재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의 결핍에 인간의 삶이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변증 대신에 생활>3이 그를 자각하는 인간 존재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언가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며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통해 내일의 삶을 이루고자 노력하게 된다.


맹목이 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힘에 의한 살육이거나 돈을 위한 권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둘로 이루어낸 위대한 망상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힘센 바보가 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강도가 도둑이 되고 그 후에 바보가 되고서는 자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 나를 강도, 도독이라고 하는 것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신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제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만 뒤쫓으며 탐하고 소유하고자 할 뿐이다. 내가 맹목과 위대한 인간 혹은 위대해지고자 하는 인간을 경계하는 것은 그가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지가 가련한 것이 아니다. 가련한 것은 인간이다.>4 그가 위대한 인간이라면 그 위대함의 부피와 질양, 우상화를 이루어낸 시간만큼 가련한 것이다. 나는 인간의 가련함이 광기로 전환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리 원 없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어느 곳에도 인간의 바람을 채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이 평범한 인간의 실존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만은 상식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힘의 편에 서 있는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 상식적이고 선량한 미신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때 그들의 고상한 허영을 만족시키는 위선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 존재의 용기에 찬사를 보낼 이유가 있을까? 잘 생각해 보라. 타자의 용기에 박수를 치는 인간은 그러한 용기를 갖춘 존재가 아닌 대체로 비열하지만 대체로 직접 악한 일을 하지 않을 뿐인 인간들이다.



이성의 깨어 있음에 대한 요구는 맹목에 대한 경계와 이에 대한 인식의 요구이다. ‘모두를 위해서’라는 구호 뒤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이기심이 숨겨져 있다. 그 구호를 앞세워 약자를 침탈하고 목을 벤 뒤 완성되는 것이 폭력의 위대한 지배의 민낯이다. 지배자가 되기 전 그는 칼을 감춘 연약하고 선량한 인간인 척 하는 날강도에 불과했다. 그는 가장 천박한 인간으로서 가장 상위의 도덕을 논하며 대중을 선동한다. 그는 칼이라는 폭력과 맹목이라는 천박함으로 미신적 확신에 빠져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신적 확신에 의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우상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므로 당연히 자신의 생각이 가장 인간적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대중들을 선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신의 진리보다 더 상위의 진리처럼 맹신하게 만들고 그 위에서 인간들에 대한 지배를 완성한다.


<인간은 동물과 유령의 중간에 있다.>5 따라서 인간의 야만이 동물의 야만보다 잔인하고 인간의 광기가 귀신의 존재보다 더 분명한 공포를 유발한다. 악마가 신의 사자(천사)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신의 분노도, 천사도 아닌 바로 인간의 광기이며 마르지도 불타 없어지지도 않는 인간의 탐욕이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악마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 속성으로 인해 인간은 악마의 유혹을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없는 인간의 욕망 앞에서는 악마가 신에게 구원을 빌어야 할 정도로 인간은 악마를 귀찮게 하며 괴롭힌다. 타자를 파괴하며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인간은 욕망에 관한한 악마보다 더욱 악한 존재다.


상식과 보편성에 기초한 분노와 맹목적 적개심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버린 인간의 야만은 그 어떤 야만보다 야만스럽다.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죽게 된다. 누군가는 광분하고 누군가는 무기력하게 소멸한다. 야만의 광기에 대한 경계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인간의 물신 숭배적 탐욕이, 권력에 대한 편집적 광증이 맹목이라는 광란의 괴물을 깨웠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운명은 어쩌면 문명의 또 다른 면에 드리운 그림자 같은 그 괴물의 손아귀에 놀아날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는 적어도 세계 현상에 있어서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창조한 자본이라는 피조물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노예처럼 저항해야 하는 주인의 운명을 가련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파멸의 시계는 똑딱이고 하루는 저문다. 파멸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야만은 서서히 우리들의 숨통을 죄어올 것이다. 나는 이성이라는 신전에 봉헌될 마지막 우울의 축제를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영혼과 욕망이라는 두 개의 대양이 흐른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그리움이라는 요동치는 심연이, 욕망의 깊은 곳에는 맹목이라는 들끓는 용암이 흐른다. 나는 이 두 개의 조류가 부딪히고 충돌하며 조화를 이루어 인간을 인간 존재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소멸하고 다른 하나는 죽어서도 인간의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지며 두근거리는 생명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모든 모순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만이 신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참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간 존재 각자가 고유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의 존재함은 절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약함을 근본 속성으로 타고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고 당위와 목적을 미리 부여하는 것은 비참함을 더욱 비약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게 한다. 


존재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다. 특별해지는 것도 위대해지는 것도 인간 존재의 본질적 소명은 아닌 것이다.




1 항공모함 George W. Bush 호,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미국 정부가 일으킨 전쟁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군산복합체와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이 자유, 정의, 평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민하는 언론도 정치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피상적인 비판이 지면을 채우는 동안에도 전장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갔다.

2 2012년 9월 10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와 그리고 그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면서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가지의 판결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것은 그녀의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조작되었던 사건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박근혜는 이 발언에 대해 사과하며 번복한다.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라기 보다 자신의 발언이 대권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중에서

4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5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그는 “인간은 식물과 유령의 중간이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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