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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Sep 20. 2016

비극 4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7

...신의 신성 가치는 신들의 세계에, 인간의 보편 가치는 인간 존재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냉정과 냉철함에 큰 장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좌절과 비관 속에서도 현재하는 현실성 안에서 최소의 동력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의 동력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의지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사회에 순도 높은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불경한 짓이다. 인간 존재에게서 욕망을 거세하지 않고서 그러한 순도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신이라는 존재 마저도 인간의 입맛대로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절대적 존재인 신을 모순된 상대적 존재인 인간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우리의 천재 철학자1는 그 신을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불경의 죄를 물어 사형 선고를 내렸다. 나는 그가 이기적인 인간이 창조한 신에게 내린 사형 선고를 매우 현명한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신 역시 그 선고를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라 믿는다. 신의 신성 가치는 신들의 세계에, 인간의 보편 가치는 인간 존재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합리적인 의식과 논리를 인간 존재의 가치를 보편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순도 높은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논리라는 오만한 도구를 위해 인간의 가치를 희생시키고 합리적 의식은 그와 똑같은 오류의 영역에서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모순에서 순환하며 헤매는 동안 합리적 의식은 힘의 열세에 놓이게 되고 이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에게는 욕망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탈 도덕화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맹목의 거대한 힘과의 대척점에서 대등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맹목적 힘의 입장에서 이러한 순간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배자는 당황하거나 주저할 수밖에 없다. 현실 논리로 언제나 비판할 수 있었던 그들에게 공격 대상으로서 순결한 도덕적 이성이 소멸하여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덕적 이성, 그것은 존재자의 개별 삶 안에서 가꾸어지며 타자로 전해지는 미덕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명분이 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목적이 아닌 명분—어차피 권력은 도덕적 우월로 집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집권 후 법 이념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성만을 요구한다—으로만 간직할 수 있다면 이것은 언제든지 가치 지표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의 유연한 한 행태가 될 수 있다.


도덕적 순결을 강박하는 자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강박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강박하고 강박 당하는 모자란 자기 의식의 고통일 것이다.


합리적 의식의 집단은 그들 스스로 대체로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아이러니컬하게도 언제나 그 속박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렇게 자기를 강박하면서 자학하는 모양은 비극을 조장하는 맹목의 편에서 본다면 스스로 붕괴되어 버리는 상대이니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꼴이 아닐까.


합리주의자들의 정치행위로 탈 도덕화가 선행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셋째, 맹목적 힘에 의존하는 지배자와의 직접 대면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맹목은 국가라는 체계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맹목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치 작용 이외에는 다른 수단을 모색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명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맹목적 정치 결사가 사회 체제, 국가 체계의 이념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고 구체화되면 타 정치 결사에 대한 권력에 근거한 박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안에 대해 명확한 논리와 시민적 지지를 이끌 수 있는 다양한 미래 지향적 의제를 동원하고 정치 공세와 합법적인 위력과 선동을 모두 이끌어 낼 수 있어야만 한다.2


잘 상상이 안 된다면 나는 이렇게 설명을 해주고 싶다. 축구장에서 백태클과 폭력을 빼고서는 다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말이다.


독선적인 권력자와는 직접 자주 대면하는 것이 좋다. 이 대면은 둘도 없는 기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때 그의 약점들—비상식, 비논리, 미개한 인식 능력 등— 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지배적 권력자의 의식은 절대 권능을 능가하는 사실상 돌이키기 어려운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맹목에 의해 지배되는 숙주로서 타자—그의 관점에서는 피지배자들이거나 아랫것들이다—와 대면한다는 것 자체를 굴욕으로 인식한다. 치밀하고도 명확한 논리적 접근은 그의 부실한 내면 통합체계에 매우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그에게 논리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논리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기 때문에 대화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패배감을 느낀다. 이러한 대면으로 아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이 논리에 대해 자신이 설득을 당하지 않을까 경계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화를 내거나 무시함으로써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곧 돌아서서는 자신의 내면 감정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대해 후회한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모든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아닌가. 그런 존재가 아랫것들 따위에게 자신의 고귀한 감정을 쉽게 드러내다니. 그에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절대자와도 같은 망상에 빠지게 만드는 독선은 언제나 무리한 일을 추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일들은 서서히 누적되어 비극의 주인공 스스로가 파멸하도록 인도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스스로 합리적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인민들이 어떠한 비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합리주의자들 스스로 대중에게 열세이거나 혹은 피해자로 인식시키는 것은 사실 그대로 그들이 열세이거나 피해자가 될 뿐 인민들이 기댈 수 있는 어떠한 세력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고 또한 이들을 지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 시민의 의식도, 무리 진 군중심리도 정치 권력의 쟁투에서 패배하는 정치결사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당연히 지지를 보낼 이유도 없다.



맹목의 약점을 파헤치고 그것을 단 한 번에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 단 한 번에 파괴할 수 있는 파괴력은 맹목으로만 가능한 저주와도 같은 힘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망상에 빠진 영웅들이 맹목적 힘에 집착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한 단계 한 단계 침식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대단히 크고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기 전까지 그는 전혀 통증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실제 타격이 크더라도 규모가 작거나 사소한 패배에 대해서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위신에 관한 것으로 무엇보다 우선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취급한다. 사소한 불쾌감, 모멸감을 조금씩 키우게 만드는 것도 매우 지능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권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단번에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것과 달리 감정적인 불쾌감에 대해서 맹목적 권력은 조금의 자비도 없고 인내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에 대등한 힘을 보유하고 그 힘만큼 대응할 수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즉 논리적인 접근으로 인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의 영역에서의 불쾌감에 대해서는 속으로 삼킬 수 있는 체면 정도는 있지만 감정적인 불쾌감은 자신의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는 주저 없이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동시에 매우 집요하게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매우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낙관적인 결과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은 금물이다. 희망론이나 낙관론은 역설적이게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좌절하게 하며 비관하게 하는가?’ 라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인간이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냉정해지고 냉철해져야만 한다.


맹목은 인류가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매우 위험한 힘의 작용이다. 이 맹목을 제거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가 바로 정치이다. 맹목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과 추악한 사태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는 인간이 창조한 더러운 그러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냉정과 냉철함은 사유를 움직이는 근육과 같다. 이러한 의식의 기초적 받침이 없는 노력과 도전은 끝내 또 다른 좌절에 이르게 된다. 희망론이나 낙관론은 대부분 무엇인가를 원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는 원초적인 소유욕이나 유아적 성취욕—꼭 이러한 표현에 대해 거부반응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인간은 평생 유아기적 욕구와 그 잔재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 때문에 인간은 순수할 수도 있고, 양심을 보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냉정과 냉철함에 큰 장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좌절과 비관 속에서도 현재하는 현실성 안에서 최소의 동력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의 동력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의지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무언가 성취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불어넣는 집단 선동을 매우 위험한 맹목의 일종으로 여긴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낙관하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게 하는 것은 목표와 목적지 없는 맹렬한 폭주에 불과하다. 맹목적인 것에 ‘왜’라는 것이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면 냉정한 인식은 ‘왜’라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가능성을 비치는 빛과 같은 것이다.


맹목적으로 덤벼들지 말라.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충동은 절망이나 좌절보다 위험하다. 모든 문제는 상황을 어떻게 상정하고 어떻게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여 냉정하게 풀어가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해서 자신의 원의대로 사태가 진행되어 지거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이나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 절대적일 수 없다면 적대적인 인간과도 상호 이익이 될 수 있는 절충적 전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영웅 망상에 도취된 지배자와 마주하게 되면 비굴해지거나 그를 절대 악처럼 상대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그를 절대 악처럼 상대하는 순간 독선적인 지배자와 전혀 다르지 않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희망하며 반드시 그를 이겨야만 한다는 맹목적 의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결국 지배자에 맞선 또 다른 지배자가 될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독선적이 되며 악마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도취되는 다른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결국 적대적인 인간들과의 관계는 배타적이며 폭력적 대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다는 혹은 해내야만 한다는 미신적이며 강박적인 억압은 결국 열세에 놓였을 때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더욱 쉽게 파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뿐이다.


영웅 도취의 상대편에서 탄생한 영웅은 지배자의 망상에 도취되었으나 정작 상대편의 비극의 주인공과는 달리 지배자의 입지를 전혀 구축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가 절대 악처럼 혐오하던 지배자의 폭력은 더욱 광폭해지도록 만들 뿐인 것이다.



대부분 진리처럼 숭배되고 있는 이념이라고 하는 것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위의 선언을 전제로 당연히 도출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제거되어 굳이 논증할 필요가 없는 미신적인 믿음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의해 맹목이 권력을 차지하고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히틀러가 스스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의 군국주의가 우연에 의해 탄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를 지배했던 그 사회의 의식이 그리고 그 의식을 지배했던 몰상식과 광기에 의해 날조되었던 미신적 신념이, 맹목이 바로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를 탄생시킨 모태였다. 그것은 영웅을 갈망하는 대중이 낳은 괴물이 아니었을까. 대중들이 히틀러의 탄생에 환호하며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열광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있었던 광기 어린 행태를 여전히 동경하고 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이러한 인간 존재의 인식과 의식의 문제가 좀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광기에 의한 미신적 신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현재하는 우리 의식의 부조리의 현실이고 우리 사회 체제, 국가 체계는 그들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량하며 힘없는 소시민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사실이기를 바라지만 선량하고 힘없는 소시민이란 힘과 맹목 앞에 한없이 비굴한 협력자들일 수도 있다. 힘에 대항할 용기도 힘도 없기 때문에 힘, 혹은 맹목과는 다른 선량함으로 힘없음을 정당화하고 가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선량하고 힘없는 소시민의 진짜 정체일 것이다.


나는 대다수의 정치인 역시 이러한 인민들의 비굴함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 모두는 온순한 그러나 가장 까탈스러운 양처럼 살아가면서 포효하는 발정난 수사자가 되고 싶어하는 무리 진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러한 자기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사자가 된다 하여도 여전히 동물원 우리 안에서만 뒹굴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원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 이들은 맹목이 가리키는 손짓만 보고서도 스스로 옷을 벗고 산 채로 화장터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로움으로부터 탈피하지 않는 자의 힘을 얻기 위한 투쟁은 아무런 성화를 얻을 수 없다. 정의로움, 즉 옳음이 언제나 힘을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확률이 더 높다. 다만 영웅 망상에 도취된 지배자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명분으로서만 정의를 외치고 지배자가 된 뒤에는 정의의 지배에서 자기 권력은 예외로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맹목을 상대로 정치권력을 빼앗기 위한 현실적 힘의 쟁투라면 자신의 투쟁이 곧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의식은 버려야 한다. 권력의 작용에 있어서, 더구나 영웅 망상에 도취된 권력을 상대로 쟁투를 벌이는 것이라면 매우 현실적으로 교활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무런 의미없는 정의의 구호만 외치거나 매우 비겁한 선량함으로 자신을 포장한 채 이도 저도 아닌 패배로 투쟁은 끝맺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비겁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선량한 척 할 뿐>3이지만 실은 매우 비열한 것이다.


정의로움이 정의롭기 위해 취하는 가장 손쉬운 태도가 맹목이 폭력으로 지배하는 방식과 어떻게 달랐는지 혹은 다를 것인지 나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명확하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양보 없는 맹렬한 힘의 대결을 펼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정의롭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당위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거대한 구호보다 ‘왜’ 라는 의문과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도전적이며 가치 창조적인 투쟁이 될 수도 있다.


가끔이라도 인간의 세계가 야생동물의 생태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야만적인 비극을 현

실 세계에서 직접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비극이 우리의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힘과 맹목을 추종하고 싶으나 좀 더 고결한 인간인 척하기 위해 잠시 반대편에 서있는 위선적인 그런 부조리한 인간일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 상대편에서는 반가치적이고 반인륜적이고 반도덕적인 것이 바로 맹목이라는 것의 실체다.


자신의 삶이 속한 이 세상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비극의 왕국에 입성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 비극의 여왕은 되지 않기를 또한 진심으로 바란다.




1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2 Fabian Socialism

3 나는 이 말을 어디서 들었으며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모에 비추어 보건데 분명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 말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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