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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Sep 12. 2016

비극 3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6

...완전히 정의로운 세계에서
전혀 긴장을 하지 않는 안일한 정의는
부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사회 체제에 속한 각자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존재라는 관점에서 다른 존재자에 대하여 바라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끌림과 떨림을 통해 서로의 의미를 주고받고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과정은 늘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만 전제할 수 없다. 개별 존재자의 살아감 속에 희로애락의 순리가 있다면 그 인간 존재가 속한 집단인 사회 체제에도 그러한 순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이 가장 잘 녹아있는 것이 나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왜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며 누가 이러한 비극을 조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통해 나는 사회 체제가 나아갈 새로운 의식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학문으로서 진리 탐구와는 무관하게 한 존재자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과제 중의 하나라고 본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누구나 생각한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그 역시 단 한 사람으로서 존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치 있는 사유들이 모든 인간에게 같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의미는 그의 삶과 그의 가치와 그것을 있게 할 수 있었던 그 자신의 사유 속에, 나의 의미는 나의 삶과 나의 가치와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나의 사유 안에만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는 고대의 사상으로부터 겪어보지 못한 미래의 가치 사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재탐구하며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인류의 모든 철학자가 모두에게 바라고 원하는 그래서 그들이 치열하게 사유하고 또 사유했던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사상가로서 학문적 영역에 속하는 이론을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만의 삶을 통해 일군 나 자신만의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유의 고유성이 갖는 의미의 가치가 문자의 유사성이 갖는 유력한 사상가들의 명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순수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것은 그들의 의미 안에 있고 나의 것은 나만의 의미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단편적인 그리고 얕은 생각일지도 모를 나만의 사유를 통해 적어도 맹목의 숙주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성적 능력은 갖추게 되었다. 다소 비약적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만의 사유를 위한 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이로써 겨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비극’의 무대 바깥에서 ‘비극’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웅주의의 망상에 사로 잡혀서 비극을 조장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을 장애물—이 장애물들이 실은 합리적이거나 타협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웅주의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이기주의다. 영웅적 비극은 다수의 무고한 희생을 악으로 규정한다. 영웅은 신과 같은 정의의 힘으로 선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 만들고 또한 이를 정당화하고 결과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다.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바를 성취하게 되면 또 다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도 유리하고 개별 단위의 목적을 쉽고 빨리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위해 거의 동물적 본능과 같은 추진력을 발휘한다. 즉 합리적인 의식이 이를 따라잡기 위해 두뇌를 사용할 때 그는 자신의 유전자에서부터 비롯되는 본능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전략을 펼친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에서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하기 때문에 권력욕에 사로잡힌 대중의 시선에 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쟁투 혹은 권력 투쟁의 관점에서는 그 전략의 탁월성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없다. 합리적 이성에게 이것은 명백한 충격이며 공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혼돈 즉, 비극을 조장하는 그의 존재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과연 스스로 소멸할 때까지 이 비극의 주인공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충격과 공포. 생각 끝에 이것의 뒤를 잇는 것은 이 혼란을 조장하는 자아도취에 빠진 영웅에 대한 조롱이며 비웃음이다. 비극을 누가 탄생시켰는가. 인류인가? 아니다. 인류는 신을 탄생시켰다. 비극을 탄생시킨 것은 머저리 같은 영웅심에 들떠 설쳐대던 얼치기들이다. 누가 신을 죽였는가? 니체인가? 물론 아니다. 인류는 자신이 필요한 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탄생시켰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였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부활시켰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성령을 불러들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지옥과 천국의 문을 번갈아가며 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러한 인간의 피조물인 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버린 것이다. 그러한데도 신은 니체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면 대체 그 이기적인 얼치기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참된 신은 어찌 되었단 말인가.


신은 이기적인 영웅들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살아있으면서 존재하거나 부활했으며 실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신은 신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존재할 것이고 인간과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 안에 실재할 것이다. 그것은 신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신을 바라보는 모든 존재들의 구원을 갈망하는 진정한 눈빛과 마주하며 현존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것은 비극에 대한 말 같잖은 분석이며 논리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인식에는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분석하고 평가—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신에 대해서도 평가 한다—하는 구조가 존재하며 이 구조 안에서 의미가 작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과 인식의 바탕인 의식이 지배하는 집단이 이성적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 집단의 다수가 비이성적이라면 소수의 이성 역시 마비되고 만다.

 

이성의 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작동시키는 재료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존재 외부에 사실과 사태들이 있고 이것은 존재자의 인식을 통해 이성의 동력을 작동시키게 된다. 즉 외부의 사실, 사태들을 인지, 분석, 판단하면서 내부의 의식에 전달, 저장, 보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인식의 과정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식하는 과정은 인간 존재 모두에게 거의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의 단계 하나하나를 분리해 인식하고 의식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인식과정은 통합된 목적지를 향하게 되어 있다.1 


인식된 사태들을 외부로 표출할 때에는 어떤 이들은 논리적 기제를 통해서, 어떤 이들은 감성적 기제를 통해서, 어떤 이들은 복합적으로, 또 어떤 이들은 직관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각자 삶의 방식, 의식의 환경, 지식의 보유 정도 등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인식과 표현이라는 이 두 가지의 재료들로 과연 영웅적 비극에 도취된 맹목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해 나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의 인식의 통합체는 이분법적 흑백구조로 매우 단편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오류를 빨리, 쉽게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의식의 오류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몇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자면 첫째, 무조건적인 희망과 낙관을 피해야 한다. 이는 냉철한 관조적 인식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합리적 의식 집단은 부조리한 집단들과 일정 부분 서로가 상응하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같은 사회 체제 안에서 구축하면서 생존해 왔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생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세계에 절대 순수는 존재할 수 없다. 절대 순수의 존재를 고집할 경우 상대적 존재인 인간의 세계에는 절대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정의로워야만 한다는 순수 목적은 인간의 사상에 순결을 강요하게 되고 사상의 순결은 그 자체로 고유한 진리처럼 행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결한 이념에 반할 경우 어떠한 형태로든 처단, 제거되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정당한 절차와 수단과 방법론들은 배제되는 극단적 위험성으로 치닫는다.


다시 말해 맹목을 제거하기 위해 순결한 사상의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순간 그 ‘순수’가 곧 ‘맹목’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의식 집단이 인간다운 보편적 세계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상황의 부조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의 현재성, 그 현재성의 재료들이 부조리와 비합리성과 맹목의 일정 부분과 융합되지 않고서는 합리적 현실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인류 사회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또 생존의 본질은 사실 대부분의 부조리와 약간의 양심이 어우러진 그 현실성에 있다.


이 부정과 부조리의 현실성—현실성은 본질을 지배하지 못한다—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지극히 당연한 사회적, 정치적 현실 현상의 일부라는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다만 그 현실을 바탕으로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양심, 인류 보편적 가치 자체에 대한 배반이 없이 유지될 수 있는 현실성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정과 부조리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최대한의 의지와 이것을 뒷받침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리적 의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의 인식의 통합체를 교란하기 위해 판단과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 만한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먹잇감은 그의 생존과 숙주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게 할 만한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정치 권력의 쟁투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념 논쟁이 아니라 돈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맹목 집단의 정치 문제 대부분은 경제적인 문제—이권 다툼—로 시작해서 경제적인 문제로 불거지고 경제적인 문제로 타협되게 되어 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전쟁이 그러했고 모든 권력 쟁투가 그러했다. 여기서 아마도 합리적 의식 집단의 첫 번째 딜레머가 작동할 것이다. 돈과 도덕성의 문제, 청렴과 죄책감, 만일 이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면 이들은 본능적 전략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일방적 열세에 있다고 보면 된다. 돈과 가치는 언제나 혹은 대부분 서로 상충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것에 있어서 맹목은 양심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 의식은 양심이 아닌 그 자체의 의식 때문에 한쪽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고 다른 한쪽은 열세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가만히 지켜보면 합리적 의식 집단의 모순과 위선적인 문제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완전히 정의로운 세계에서 전혀 긴장을 하지 않는 안일한 정의는 부정과 다를 바가 없다. 적어도 힘에 있어서 그 비중이 낮은 정의와 비중과 밀도가 높은 부정에 대한 투쟁과 저항이 세계를 깨어 있게 하고 연약하면서도 합리적인 다수를 결집시킬 수 있다. 그것이 가치의 본질이다. 힘의 세계에서 힘을 숭배하되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위선을 부리며 주저하는 사이에 힘 자체 만을 숭배하는 맹목에게 지배 당한다면 세계의 모든 가치는 암흑 속에 갇히게 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1 물론 나는 이것이 과학적 진리인지를 직접 검증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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