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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Oct 02. 2016

인식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19

이 세계의 가장 큰 불행과 재앙은
경제적 빈곤, 전쟁이 야기하는 살육과 파괴,
사회 불안과 도탄이 아니라
사상의 빈곤으로 인한 보편성의 말살이다. 





나는 자신을 존재자로서 스스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인간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자인가 하는 의문이 자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매우 당연한 듯한 모든 것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사유, 그리고 성찰을 통해 인간의 관념은 풍성한 인식의 재료들을 갖출 수 있게 된다. 또한 관념이란 이 재료들을 통해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향해 사유하게 하고 그것들은 다시 인간의 관념 속으로 녹아든다. 


나의 관념 세계에는 아직은 살아가는 과정에 불과한 미완성의 것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나 자신의 세계에서만 가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 혹은 비판하면서 나의 삶과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회의하며 나의 사유를 조금씩 구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과정을 통해 배우는 지식 역시 중요한 인식의 도구이다. 그러나 지식을 학습한다는 것이 인식의 전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지식이 유용한 도구인 것은 사실이다. 지식은 가치의 도구로서 삶의 내면과 물질적 삶에 기여한다. 


지식은 가치를 바탕으로 습득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지식은 인간 존재의 가슴을 앞질러 가서는 안 된다. 인간 존재와 존재가 각자 타자로서 관계를 이루고 확장되어 이룬 사회 체제 안에서 지식의 습득량을 토대로 얻을 수 있고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대한 당연한 존경은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천박할 수 있는가를 내게 일깨워 준 것은 학교였다. 동시에 그것을 절대로 일깨울 수 없도록 강요한 것도 역시 학교였다. 학교를 통해 우리는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회의와 강요였다. 학교를 통해 인식의 적정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다른 곳을 통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최소한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학교라는 곳은 단편화된 지식과 획일화된 의식의 최대량을 의미 없이 늘어놓고 주입시킬 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가늠해 보기 힘든 사상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더더욱 왜곡된 궤변들을 늘어놓는다. 적어도 사상과 인식에 대해 고민을 하는 존재자라면 자신의 삶을 통해 스스로 ‘인식’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 세계 그 어디에서도 인간 존재를 위한 가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존재를 세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인식의 눈을 가리기 위해 모든 짓을 다할 것이다. 세계는 인간의 인식이 나태해지는 만큼 교활해진다.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는 이 세계가 제시하는 거짓된 진리와 논리 앞에서 반박할 권리도 없고 억울해할 권리도 없다.


어둠 속을 걸을 때 가끔 나타나는 몇 개의 불빛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식의 한계이며 이 한계는 언제나 인간을 무지하지 않다고 착각하게 하고 또 무지하게 만든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듣고 보고 느끼는 감각과 의지를 통해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지 그 한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인식 주체에게 일어나는 필연적이고 기본적인 사태이다. 왜? 라는 근본 원인에 대한 도발, 무엇이? 라는 목적 본질에 대한 회의, 누가? 라는 주체 대상에 대한 인식과 저항, 어떻게? 라는 방법적 창조를 통해 인간의 이성은 비판적 인식으로 부조리의 최소한조차 거부하고 보편성과 새로운 가치 창조를 시도하게 된다. 비판은 인식의 가장 기초 작용이며 창조적 인식의 첫 출발점이다.


이 세계의 가장 큰 불행과 재앙은 경제적 빈곤, 전쟁이 야기하는 살육과 파괴, 사회 불안과 도탄이 아니라 사상의 빈곤으로 인한 보편성의 말살이다. 파멸하는 세계는 사상의 빈곤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사상이 빈곤할 수밖에 없는 한, 사상이 지배적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인간 존재의 위기 즉, 보편성의 몰락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나 지식은 전혀 창조할 수 없게 된다. 사상은 인식으로부터, 인식은 비판을 통해 새로워진다.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분석적 비판을 통해 당위의 주입을 거부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하고 번민—인간 이성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순간이 번민하는 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번민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의 순간에도 번민하게 마련이다. 차라리 직접 뜨거운 번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인간이 피하고자 하는 불필요한 번민을 없애는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한다—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식은 또한 인간 존재를 주체적 자아로 거듭나게 한다. 인간이 자신을 주체적 존재자로서 인식하지 못할 때 즉, 인간답게 세계를 인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 인간에서 벌레에 이르는 노예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뛰어난 유인원에 머무르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인간—어쩌면 모든 생명체는—은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인간 존재의 정신은 자유로우며 이성을 통해 표현한다. 인간은 자유에 집착하는 만큼 정신에 집착한다. 자유는 정신을 품은 모태이며 정신은 관념의 품에서 사상으로 자라게 될 태아와 같은 것이다. 정신이 인식의 날개를 달지 못했다는 것은 정신이 억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체적 자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자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체로서 인간에 불과한 노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란 존재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유한 본질이다. 이성적인 개별 존재자의 고유성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신성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숭고한 인간의 존엄성 혹은 신성은 체계, 체제를 위한 소모품이나 도구로서 부속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애국이라는 선동이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성을 국가를 위한 맹목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원시적인 극단적 근본주의 의식에 맞서 인류의 보편 일원으로서 저항해야만 한다. 이 저항은 곧 인간 존재로서의 생존을 의미한다.

 

국가란 원시적인 부족으로 언제든 퇴행할 수 있는 과거의 것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체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미래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보편 인류의 관점에서 부족 체제의 문제를 냉철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냉철한 인식만이 국가를 인간 존재를 위한 체계로 거듭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러한 하나의 체계가 근원적으로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미래의 종말적 파괴는 막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미래를 질투하는 자는 반드시 과거의 오류를 통해 매우 미약한 현재의 미덕과 불확정적인 미래의 번영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선을 질투하는 평범한 인간은 성자가 되고자 참된 선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악을 실현하고 청빈을 비웃는 자는 부자가 아니라 강도가 되기 마련이다. 강도들은 부자가 청빈에서 지혜를 얻었다—물론 아닐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미덕을 찬양하기 위해 육체와 인간의 욕망을 경멸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욕망 자체를 향해 죄의 유무를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한편으로는 이성과 고결한 인간다움을, 한편으로는 광기와 지배욕을 동시에 충동질한다. 욕망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이든 결코 나태한 법이 없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 있으며 그 자체로 역동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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