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환 Oct 09. 2016

인식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0

가장자리에 나는 던져진 존재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의지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또 저무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인식이다.
이 인식의 문을 통해야만 존재자의 그늘진 의식에 태양을 비출 수 있게 된다.



*
인식의 무의지, 인식의 불능의 상태에 있는 인식하지 못하는 무리 진 이들의 귀와 눈을 열고 의식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자비한 고통과 고난에 빠뜨려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만족하고 고무된 채로 이 세계에 끼치는 해악이 그들이 겪게 될 고통보다 훨씬 크다. 새로운 인식을 위해 고난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인식하지 못하는 무리 진 이들이 맹목을 벗어 던지기 위해 고통을 겪는 것이 그들이 세계에 혼란을 주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훨씬 덜 끔찍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무신론자들이 신의 존재의 현실성에 동의한다면 나는 신이 더욱 자주, 더 큰 시련을 인간에게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고통을 통해 인식의 눈을 뜨거나 전환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굳이 믿지 않더라도 신을 마주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역시 그의 곁에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방법론에 집착하면서 모든 것의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여긴다면 그 상태 자체에 대해 맹목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고결한 미덕도 도대체 왜? 라는 인식을 위한 회의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맹목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맹목적 의식에 대해 자신만은 예외라고 믿고 확신하는 맹목의 추종자가 되어 버렸다. 보편적 인간 존재의 특별한 능력이 자신의 곁에 있을 때 자신만은 그 능력을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존재자처럼 말하고 행세하지만 사실 사회를 지배하는 서열에 의해 맹목을 추종할 뿐 고유한 인간의 모습과 능력은 기억할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인식하지 못하는 매우 우매한 무리 중 한 개체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의지와 고유한 사상을 가지지 못할 때 쉽게 의존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바로 맹목적 신념이다. 그 상황에서는 신에 대한 의존 역시 그 내용은 맹목이가. '그렇다'라고 외치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또 몰라도 되며 '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허한 구호들의 난무, 그것이 맹목의 실체이다.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 인간 존재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은 가장 원대한 맹목일 수도 있다. 살아 있으므로 살아가고 살아가므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이 거대한 맹목의 순환으로부터 탈피하고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누구나 시도해봄 직한 가치이지만-또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디오게네스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어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앞에서 그의 지혜를 칭찬할 것 같지만 막상 우리는 그를 거지라며 손가락질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식과 인식의 현실이다. 우리의 의식과 인식은 언제나 그럴 듯한 시늉만 하고 있을 뿐 아직도 고대의 적대적인 부족 체제 시대의 원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소크라테스부터 칸트 이전까지도 천박했고 칸트 이후 재앙을 맞이하는 그날-어쩌면 이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인류의 이성 의지는 끊임없이 이것으로 인해 번민하게 될 지도 모른다-까지도 천박했다.
문명은 비대해졌으나 의식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문명의 성장만큼 진보한 것은 안타깝게도 미개하고 야만적인 탐욕뿐이며 의식은 아주 멀리서 더디게 쫓아오고 있다. 먹고 살아가는 생존의 문제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바로 가치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문제이다. 인간의 의식을 위한 인식의 실재 작용을 찾고 비판적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시급-현재 우리 사회는 하나의 의지에 대해 회의적 시각으로 이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는 인식의 상대성으로 인한 야만에서 야기되는 적대적 충돌을 조금이나마 완충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맹목을 의심한다고 해서 그것의 정체를 인식하거나 깨우치거나 혹은 좀 더 나은 인류의 일원으로서 인식하거나 사유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관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의 확신은 맹목이 아닐까'하는 회의를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맹목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그럴듯한 하나의 시늉에 불과하며 문명의 자부심을 과시하려는 허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

인류는 신분 혹은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방편으로 반드시 재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가 이것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는 생각보다 그리 만민한 일은 아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거부들이 수많은 시간을 쏟아부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실패했고 파멸에 이르게 된 인간도 있었다. 높은 계습을 성취하는 것이, 많은 재화를 소유한다는 것이 곧 재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은 재화-이것이 재화가 아닌 자본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를 소유한 노예가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많은 양을 소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비중만큼 수고의 대가를 요구하게 되고 인간은 그 무게에 눌려 고통 속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재화 혹은 자본, 높은 신분을 가지고 의연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고통은 모두 인간 존재 스스로의 탓이다. 물론 많은 재화, 자본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자본과 재화를 어떻게 획득하고 어디에 소모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

아침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시간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곧 배가 고파지고 하루가 고단해지면 순간 행복은 불행으로 돌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곧 그가 자신의 환상을 만족시켜 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침이 되면 저녁이 오기 마련이고 타자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마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어느 곳 가장자리에 나는 던져진 존재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의지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또 저무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인식이다. 이 인식의 문을 통해야만 존재자의 그늘진 의식에 태양을 비출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인식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