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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Oct 16. 2016

어리석음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1

...현재 세계의 무게는 세계의 크기나 인간 사유의 깊이가 아니라
그 크기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개체 수에 내재한
부조리와 몰인식, 무사유라는 어리석음에 비례한다...




단순 지식이 집단 지성을 이루고 그것을 통해 성취하게 된 신분이 상위 혹은 특권층에 속할수록 또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믿는 만큼 그 집단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와 결함을 보완하고 그것을 공유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평범 이하의 무능마저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처럼 미화하기도 한다. 적어도 그 한심한 무능이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평범 이하의 특별한 능력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한 착각을 통해 자신들의 맹목적 지배욕을 정당화하고 체제 혹은 체계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해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믿음이라면 이성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은 이해를 보완한다. 지성이 이해를 거부하고 믿음만 추종할 때 지성은 지배를 위한 순수한 폭력이 된다. 우리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성인의 가르침을 새길 필요가 있다.



인식하지 못하는 무리 진 인간을 손쉽게 이끌 수 있는 것은 힘이라는 어리석음이다. 힘은 ‘나’라는 존재자를 위한 한 방울의 물리적 작용 근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힘’에 집착하는 것은 이 ‘한 방울’, 즉 ‘한 줄기의 배설’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힘은 아침에 한 번 화장실에서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힘의 목적에 의해 과정의 오류들이 너무 쉽게 정당화되고 있다. 목적을 위한 성취욕구라는 조건이 소멸하지 않는 한 힘은 계속해서 맹목적 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에는 인간 무리의 집단적이고도 광란에 가까운 쾌락—이 쾌락에는 필연적으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부정과 부패도 포함되어 있다—이 도사리고 있다.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조차 성취감이라는 쾌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눈 먼 인간 존재의 맹목이 갈망하는 쾌감은 그들을 더욱 광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어떠한 목적 성취를 위해 우리는 우연과 어리석음이라는 상수를 고려해야 한다. 늘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상수이며 정도의 불명확성으로서 변수인 것이다.


현재 세계의 무게는 세계의 크기나 인간 사유의 깊이가 아니라 그 크기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개체 수에 내재한 부조리와 몰인식, 무사유라는 어리석음에 비례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와 자연에서 차지하는 먼지같은 크기 만큼의 비중이라도 지혜로울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덜 파괴적인 세계에서 조금은 더 인간답게, 조금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명망 있는 막강한 한 사람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평범이라는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의식을 포기하고 타자를 억압하고 주저없이 학살한다. 이것은 과거 역사에 등장하는 어느 특정인의 기록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현재라는 시간에 진행되고 있는 일반적인 만행이며 보편적 광기이다. 이들은 자신의 광기를 인식하기보다 그 광기에 저항하는 인민 대중을 향해 고집을 꺾으라고 호통친다. 그 확신에 찬 왜곡된 인식과 천박함이 타인에게 고집을 꺽으라고 하는 그 고집을 먼저 꺾을 수 있었다면 몇 푼 되지도 않는 위신이나 확신보다 더 중요하고 평범한 보편적 상식이 왜 진리라고 하는지 그 어떤 사악한 무지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무게 속에는 이러한 자들의 천박한 위신과 광란의 무게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자연의 중력만으로도 인간이 비참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가 이러한 위신과 위협, 체면 따위의 쓸데없는 무게까지 짊어져야 하는가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권력에 도취된 한 지배자는 ‘쓸데없는 생각—생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을 통해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는 일—가령 예를 들면 하루에 여러 차례 옷 갈아입기—’을 하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 사실 권력에 도취된 지배자들의 이러한 행태는 매우 전형적인 어리석음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작으나마 누구에게 덜 해로울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좀 덜 쓸데없는 낭비라는 것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그 시대와 역사의 불행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에게 목적적 당위가 있어야 한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지배에 대한 자기 확신이 유일한 당위일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당위를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 속에서만 찾기 때문에 세계를 차지하는 오물과 같은 어리석음의 비중과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초월한 우아한 깃털 같은 집착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는 망상 속에서 홀로 전설이거나 신화적인 영웅이 된다. 자신을 향한 외침이란 언제나 천한 것들의 아우성으로 하찮게 여긴다. 파리나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 중 한 마리가 짖으면 따라 짖어대는 개떼와 같은 울음 소리,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는 파리를 먹이 삼는 도마뱀이나 개구리나 두꺼비가 되는 것이 낫다. 굳이 자기가 천박하게 여기고 또 먹이로 삼아야 하는 파리떼나 모기떼의 추앙을 받고자 그가 지배자가 되어야 하며 더구나 영웅적 숭배를 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위대한 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지배욕과 탐욕은 모든 것이 과도한 망상에서 비롯된 천박한 허영심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가 제대로 된 자이든 그렇지 않든 지배자 혹은 지도자로서 인민에 대한 의무의 최소한이며 인민이라는 최종적 주권자에 대한 신성한 권리이다. 이것은 결코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라는 것에만 한정되는 조건이 아니다.


약속을 저버리는 지배자들이 유감이라고 말하며 웃을 때 비로소 인간들은 황새 임금에게 잡아먹히며 죽어가는 한 마리 개구리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다. 필연적으로 실망은 어리석은 기대에 대한 결과물일 뿐이다.


무리 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모욕을 당하고 이로 인해 분노하고 증오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손해를 보기 전 여유로운 상태에서도 타자를 경멸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욕의 순간 그는 자신이 타자를 경멸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경멸했던 기억 자체가 없다면 ‘나는 누군가를 모욕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분노하게 되는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너를 경멸하는 인간이 너의 분노에 대응할 만큼 가치 없는 인간이거나 너를 향한 그의 분노가 그 자신을 낭비할 만큼 네가 가치 없는 인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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