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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Oct 22. 2016

어리석음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2

인식의 세계에서 믿음은 죄악이다...
...우리는 늘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보편적 관점의 공감대를 가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진리라고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간은 욕망 앞에서 예외 없이 자신을 속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욕망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거짓이 정당화에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순결한 존재 자체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부조리는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경험에 의한다면 부조리한 인간보다 순결한 인간, 보다 정확하게는 순결한 인간 존재를 열망하는 인간들이 이 세계를 더욱 위태롭게 한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과 같다. 이 욕망이란 부조리와 쉽게 융합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것은 다시 인간의 욕망에 부역하게 된다. 부조리는 때로는 인간이 인간을 경멸할 수 있는 이유이며 존재의 내면에 도사린 어리석음의 정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욕망을 추종한 결과가 자신의 현실을 파괴하고 배신했다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욕망을 추종한 결과 그에 따른 고통은 너무도 당연한 대가가 아닌가. 그러나 의외로 이러한 자업자득에 대해 반발하며 분노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욕망에 대한 성취 욕구였는데 그것에 따르는 당연한 고통은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배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잘 농락할 줄 알았다. 하나의 욕망을 던져주고 대중으로 하여금 그 욕망에 아우성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아우성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고 또 비웃는 것이다. 


욕망의 추종에 대한 대가로서 고통을 호소하고 분노하는 것은 지배자들의 비웃음에 쾌감을 배가시켜 줄 뿐이다.


인간은 자주 바보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가끔 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대다수가 이러한 한심한 무리로부터 자신만은 언제나 예외라고 믿는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또 다른 보편적인 어리석음이다. 왜 고대의 현자들이 델포이 신전 기동에 <너 자신을 알라!>고 새겨 두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어리석은 인간일수록 자신의 어리석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완력을 동원하고 또 이에 추동하기 위해 쉽게 무리 속으로 뛰어든다. 이 위험성은 인간의 문명과 이를 이룬 인류의 욕망이 빚어낸 매우 일반적인 야만성이다. ‘그렇다’하는 것의 당위에 ‘왜’라는 회의적 비판적 인식이 없다는 것은 무리의 위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무리’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인식하지 않음’의 정체란 결국 한 점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배자들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최악의 자학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무리 속에서 ‘정체’지어지는 ‘우리’의 맹목적 집단 의식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무관심 속에서 매우 잔혹한 범죄의 형태로 저질러진다. 그리고 인간들이 누리는 일상은 누구나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는 무감각한 평온으로부터 범죄의 죄책감은 위로받게 되고 잊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무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맹목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마치 이상 세계를 논하듯 맹목을 추구한다. 또한 인간의 무리는 인간의 선량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이것 자체가 맹목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자기가 유발하는 사태 모두를 정당화할 수 있는 불결한 능력 또한 갖추고 있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인간의 본질적 선함은 양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그가 어떠한 사태 앞에서 무슨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그의 선, 악이 결정된다. 따라서 그 ‘선택’을 통해 개별 존재자의 본성은 악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악함, 동물적 본성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 일반화 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이 불결한 능력을 통해 ‘무리’의 맹목과 지배자의 영웅적 우상화를 인식하고 경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삶은 지배자 혹은 우월한 자의 명령이나 당위적 선언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가치가 이들의 개념 규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웅적 우상화에 추동하는 맹목적 무리는 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한다. 이들의 추동에 대해 맹목의 숙주가 될 무리는 신분 혹은 계급이라는 일정한 ‘턱’의 위에 있어야 할 무리로 나누고 싶어 한다. 이러한 ‘턱’이라는 계급적 억압을 합법적으로 조성하여 지배자를 정점으로 한 사회 체제 자체를 ‘턱’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기여하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턱 아래에 있는 이들의 고통과 좌절이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일 때 이들은 이 턱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이들의 턱에 대한 저항이 이들의 고통만큼 구체적이 될 때 이 무리를 향해 체제의 전복자라는 오명을 씌운다. 턱 위에 있는 지배자를 추동하는 자들은 이 턱의 붕괴를 체제, 체계 자체의 붕괴라고 믿는다. 이 사악한 믿음은 선량하며 가장 존엄한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신성한 신앙을 훨씬 초월하는 매우 강력한 집착과 같다. 따라서 체제의 붕괴라는 결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턱을 존재하게 했던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은 없고, 턱 아래의 무리에게 전해지는 사회 이익은 당연하거나 최소한의 권리가 아니라 턱 위의 무리와 지배자가 위에서 아래를 향해 베푸는 은혜라고 타자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즉, 이들은 단순하게 사회적 ‘턱’ 의 존재만 생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턱에 의해 지배받고 지배받아야 함을 무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새겨 넣는다. 또한 ‘사회 이익의 제공’, 혹은 ‘이익의 박탈’ 그리고 ‘이러한 공동 체계의 운영 권력에 대한 지배력’이 ‘체제를 이루는 모두가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게만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근본 오류와 부정에 대한 인식이 지배자와 그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는 무리> 는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 일부로서 그 전체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려는 집단 영웅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이들의 망상은 필연적으로 맹목에 천착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무리 안에서 집단적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응집되는 감정 현상에 대해 세력의 반대자들은 그서이 무엇이든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심지어는 사랑과 평화를 위한 염원도 이러한 집단적 감정 응집을 통해 일어나면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맨손으로, 아무런 조직의 힘을 갖지 않고도 파괴적 권력을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 세계에 작용하는 가장 자극적인 힘,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무리 안에서 안전한 것은 오직 침묵과 고요 뿐이다. 이것은 또한 지배자가 인민들을 억압하는 폭력 수단이기도 하다.


만일 지배자 혹은 지도자가 집단에 의해 선출되었다면 또 그렇게 사회 공동 체제를 운영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러한 원리는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인간의 무리는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단 한 순간도 고요할 수가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에 이 단순한 원리가 놓일 자리가 한 군데 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어리석은 믿음은 버려야 한다는 원리 하나 쯤은 간직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지배자이든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떠한 형태로든 비난으로 시작해 비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록되는 역사의 내용은 책임을 지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순리를 거스르게 되면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에 의해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돈다. 이것은 역사적인 교훈이나 예언자들의 가르침 이전에 가치의 원리를 거스르게 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보편성의 당연한 보상, 즉 인과 응보인 것이다.


맹목적 지배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파멸로 귀착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지배자가 되기 위해 갖추게 된 지식과 정보는 한정된 시간에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는 불안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럴수록 분명하고 확신에 찬 듯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낙천적인 의연함으로 자신을 위장하게 된다. 지배자의 가장 치명적인 어리석음은 그가 의존하는 힘이 한시적이라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망각한다는 것이다. 이 지속된 망각과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깨닫는 순간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그 순간에 발견된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자는 맹목을 진리처럼 설파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무리 진 인간들은 그의 힘을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무리 진 인간들 하나 하나는 그 힘에 희생되는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맹목 속에서 지배자를 따르게 된다.


맹목과 무리의 응집은 측량하기 어려운 우주 공간에 수많은 은하처럼 펼쳐진 개별적인 사유의 초원들을 단 하나의 몰인식의 사막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그렇게 곱고 푸른 대지조차 메마른 낱가루로 만들어야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새로운 세상, <멋진 신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다. 이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희망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 이들이 지닌 오류의 위험성을 인식시켜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맹목적으로 낙관하는 희망이라는 신기루 같은 정체가 불분명한 독살자를 늘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식은 새로워질 수 있다. 인식이 새로워지는 출발점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게 되고 우리는 그 깨우침을 훌륭한 덕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최선을 다하고 통렬한 성찰을 하게 되면 과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 또한 버려야 한다. 우리의 삶은 늘 변화무쌍하며 아무도 내일을 단정하지 못한다. 통렬한 성찰이 과거에서 오늘에만 이르는 한 그것은 내일의 변화로 드러나기는 어려운 한 인간의 회한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식의 세계에서 믿음은 죄악이다. 심지어 신에 대한 인식의 초기, 회의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성인이 아닌 악마의 미덕일 것이다. —신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면 성인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해 뜨거운 회의를 통과하여야 했다.


우리는 성 토마스의 신에 대한 접촉과 그 이후 외치며 고백한 신성에 대한 인식의 희열을 이해해야만 유혹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리고 온전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진리에 대한 탐구를, 건강하고도 보편적 세계관을, 신앙을, 진리를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최선을 다한다는 선의의 성실이 항상 미덕인 것만은 아니다. 최선이란 그것 자체가 미덕으로서 우뚝 서 있는 시간보다 인간을 쉼 없는 고외와 노동으로 몰아붙이는 착취와 학대의 시간이 더 길다. 갈증과 과로로 쓰러져 죽어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흘리는 고결한 듯한 슬픔의 눈물은 인간 존재의 영혼들을 인식에서 맹목의 죽음으로 내몰아가는 독과 같은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동안 힘은 고갈되고 결국 골병이 들어 쓰러지게 마련이다.


수고를 아끼기 위해 우리는 영민함의 그늘에서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멀리 바라보되 눈앞을 헤아려야 한다. 주린 배를 채우고 졸린 몸을 누이지 않고 자신의 음식과 자리를 맥없이 양보하는 쓸데없는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자신의 고달픔을 먼저 달랠 수 있어야 타자의 고통을 치유하거나 덜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픔을 모르는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며 그의 고통을 위로할 수 없다.


우리는 늘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거울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대체할 새로운 필요가 보인다. 그것은 때때로 목적물로서 도구의 결핍이고 때때로 적대적인 상대와의 동질감을 받아들여야 할 담담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인간 존재의 한계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필연적 한계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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