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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Dec 04. 2016

존재 3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5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어떤 면에서는 생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어떤 일보다 소중한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 존재들의 일상이다. 나태해 보이기도 하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역시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화려한 것들보다 소중하다. 초라하고 비루하며 이 세계 가장자리 그늘진 어떠한 곳에 버려져 있는 인간 존재의 삶이라도 찬양 받아야 할 만큼 빛나는 그 무엇보다 숭고한 것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가 없는 곳에서는 태양조차 의미가 없다. 인간 존재가 말하지 않는 곳에서는 자연의 숨소리도 의미가 없다. 비루하게 연명하는 존재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지는 그저 썩고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혹은 절대자가 인간을 노리개 삼아 시련 속으로 던져 넣어도 인간 존재는 시련이 주는 고통 앞에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아우성 치는 인간의 삶이 없는 곳에는 세계도 없을 것이며 세계를 창조한 신도 존재할 수가 없다.


존재자에게는 선량함보다, 고결함보다 존재한다는 그의 삶에서 유래하는 치열한 생존 의지가 우선한다. 그것이 없다면 선량함도 고결함도 그 모든 것이 없는 것만 못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기도하고 생존하기 위해 먹으며 심지어 생존하기 위해 파괴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있을 때 선량해질 수 있고 의미를 통해존재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착한 사람이 된 이후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한 이후에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정직해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문명이 지속되는 한 야만도 지속된다. 문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존재해야만 한다. 야만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이 존재자들의 생존을 위한 내면적, 외면적 환경의 최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생존 이후, 죽음 이전에 인간이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졸음과 배고픔과 고달픈 일상의 무게이다.



인간 존재란 반드시 목적과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의 유지가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를 찾게 한다. 때문에 그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에 대한 가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가 살아감으로 인해 존재자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가치를 일구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번민과 혼란의 연속된 반복, 그리고 계속되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간의 좌절이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외롭고 외로운 길이 인생이다. 이 삶의 여정에 인간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리고의무만 부여된다면 그의 삶은 탄생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된다. 


인간 존재는 태생 직후부터 이미 과거의 존재이며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현재의 존재이고 운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미래의 존재이며 피조물로서 순간과 영원의 흔적 그 모든 것을 간직한 증거로서의 존재자이다.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며 또한 소멸하는 것이 인간 존재이다.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어떤 면에서는 생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 존재가 고귀하다고 믿는 이 세계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재력과 신분에 따라 차별과 억압이 난무하며 천덕꾸러기로 몰린 참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육과 파괴에 노출된 채 버려져 있는지 누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속에서 아우성치는 인간의 외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존 존재 가치는 절대적인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 인간의 생명 자체는 절대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겨우 유지된다. 거의 모든 존재자의 삶이 겨우 유지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 초라한 자신의 존재가 더는 비참해지기를 원치 않는 까닭일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비참이 타자에 의해 들춰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 체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타락한 정치가 이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미지 연출’이다. 이미지 연출을 통해 모두가 평화롭고 화목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사유의 기초를 기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지는 환영이다. 환영은 허상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존재의 실체가 될 수 없다.

 

인간 존재는 극복의 대상이나 도구로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극적인 선동을 위해 지배자들은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자주 한다. 인간의 의지가 상황과 사태들을 의도하는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구성할지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극복이 아니다. 존재자의 삶은 극복되면서 이루어지고 이어져 가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생존 의지 자체가 삶을 이어가게 한다. 안일한 순간에 운명을 개척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운명을 개척한 인간의 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평화로운 운명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자가 번민과 고통을 통해 한계를 체험하고 있을 때 비로소 운명이 무엇인지 조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인간 존재의 현실은 언제나 그 운명의 한계점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존재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보다 그의 범죄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가 박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몰염치하고 비열한 그리고 수치스러운 위선이며 야만이다. 존재자가 한 마리 야수처럼 방황하며 불행과 고통 속에 버려졌을 때 그 사회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사회 체제가, 국가 체계가 과연 인간 존재에게 규율을 요구하고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하며 법을 집행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회의하게 된다.


인간 존재는 자신의 삶이 어느 시점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 운명 지어지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자는, 특히 굶주림과 고통에 직면한 인간 존재는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속성이며 한계이다. 물론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사회 체제가 개별 존재자를 불안으로 내몰아감으로써 이러한 위험은 더욱 커지게 된다. 사회가 하나의 국가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존재를 보호하지 못할 때 인위적인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자연적으로 그 체계에는 균열이 생기고 그것을 방치하게 되면 균열은 가속화되어 마침내 그 체계는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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