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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Dec 19. 2016

존재 4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6

모든 인간의 예외없는 결론이 죽음인 것처럼 
모든 존재자에게 사랑은 존재의 최소 전제이다



자신에게 어떠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자는 여전히 내일이나 어제가 아닌 오늘 바로 지금 그 순간만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억압에 대항해 인간의 의지는 사상의 힘으로 저항하며 자유를 쟁취한다. 그러나 숙명과 불안에 대해 저항할 수단은 사실상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내면 의지는 불안에 의해 쉽게 좌절한다. 이러한 좌절은 분노하게 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이 분노는 사회를 향한 이유 없는 증오의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인간은 의외로 인간 존재와 사유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낮다. 불안은 이러한 낮은 이해력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차가운 이성에 의지해 생각해보게 되면 인간은 원래부터 인간에 의해 이해되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은 존재자와 타자와의 결속을 붕괴시킨다. 범죄로 인해서만 이 결속이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불안에 의해 절망하고 좌절하는 순간 인간 존재는 의지할 곳을 잃게 되고 이러한 상실이 질병으로, 혹은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세금만 챙기는 국가 체계의 무관심과 무책임이라는 사악하며 무능한 방관자가 있다. 


사회 체제는 존재자와 존재자의 이성적, 감정적 결속에 의해, 이 결속은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의 인간적 유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존재자와 타자는 원래 서로 이해하기 때문에 친밀한 것이 아니라 친밀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삶이란 낯선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며 그것을 통해 존재자의 자아가 성숙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존재자가 자신의 자아와 마주하고서야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 존재자는 타자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존재자와 존재자의 결속이 사회 체제를 이룰 수 있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으며 인간 존재는 그 사회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인간은 타자와의 사랑으로 인해 탄생하고 자라며 한 존재자의 사랑에 의해 살아가고 그 사랑 앞에서 소멸한다. 그것이 욕망이든 부조리이든 혹은 범죄로서 살육에 의한 것이든 소멸에 앞서 모든 인간 존재는 어느 순간 최소한 단 한 번은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예외없는 결론이 죽음인 것처럼 모든 존재자에게 사랑은 존재의 최소 전제인 것이다.


사회 체제는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 인간 존재를 위한 최소 전제를 최대한 보장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모든 범죄는 이러한 의무의 소홀에 의해 발생하지만 국가 체계의 법은 개별 존재자 각자에게 매우 구체적이고 가혹한 책임을 떠넘긴다. 그리고 선량하게 살도록 강요하고 더구나 형평성이라는 최소한의 신뢰마저 저버린 법의 이름으로 호통치고 명령한다. 이러한 국가 체계에서 존재자의 선량함이란 사회 구성원의 미덕이라기 보다 속이기 쉽고 이용해먹기 좋은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도구이며 권력에 순종시켜야만 하는 대상물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 존재는 그가 원치 않는 어떤 부당한 상황에 강제로 놓이게 되었을 때 스스로 괜찮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위로하기도 하고 인간을 우매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에 의해 국가 체계가 운영되고 있을 때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맹렬한 지지를 맹목적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는 있어도 이 상황에서 그들 스스로가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도 않으며 감출 수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집단과 스스로를 일체화한다. 그러나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들은 그렇게 미미하게 무리 지어 추종하는 존재들과 일체화할 의사가 없음은 물론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한 맹신은 배신만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차피 그 어떠한 대가도 필요없이 모든 부당한 처사에도 믿음을 보내는 이들에게 애써 잘 대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매우 적절한 대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배신은 배신이라고 할 수 없는 맹목적 믿음에 대한 추종자들의 자기 파멸인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인간, 그 순간의 사태에 이르게 된 인간 존재는 ‘누구나 그렇게 산다’는 위안을 하게 되고 의외로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 자주 노출되며 이성의 공황 상태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치명적인 순간을 무기력하게 맞이할 수밖에 없다. 자초한 일이므로 분노하지도 못하고 자멸하듯 좌절 속에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피해갈 수 없는 잔인한 덫을 운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면 운명이라는 것은 동시에 인간 존재의 주체적 자아에 의한 능동적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운명이라 지칭할 때 이미 그는 스스로의 이성을 바탕으로 그러한 맹신을 정해진 운명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운명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잘못 선택한 운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잔인한 것인지 저항할 수 없는 자초한 재앙의 올가미가 숨통을 조여올 때 우리는 그제서야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며 신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숙명론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인간—특히 무리 진 맹목적인 인간들—은 상황론을 창조했다. 그리고 사회적, 상대적 환경을 임의로 설정했다. 존재자의 주체적 선택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환경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든 상대적 변수이다.


운명지워진 불행에 대해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한계와 부조리를 기만하기 위해 환경을 개척하는 위대한 허상, 즉 영웅이라는 우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신화는 탄생했다. 이 인간형은 현실이 아닌 신화 속에서 모든 고난을 극복하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비루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실재하는 현실 안에서 그는 언제나 비참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보편적 인간 존재에 비해 우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적 인간의 우월감이나 비장함만큼 미련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권위는 없다. 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권위를 카리스마라며 칭송한다. 가히 어리석은 인간 군중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 인간 존재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업적을 순간보다 더 짧은 순간에 영원처럼 새겨두려는 미련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삶에는 절대적인 것—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은 절대적이다—도 영원한 것도 없다.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순수 그 자체로 온전하게 존재하기 어렵다. 존재자는 늘 상대적인 사태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 존재는 온전하게 선량하기조차 쉽지 않다. 보이지도 않고 증명하기도 힘든 선량함이라는 막연한 관념이 어쩌면 이 모든 상대적인 사태 중에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영원에 가까운 유일한 인간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황에 대해 ‘상황에 따라 인간은 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두 개의 의문을 답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다. 첫째, 이 의문의 주체가 되는 존재자는 변하지 않을 수 있는가? 둘째, 응답하는 존재자는 변하지 않을 수 잇는가? 이 두 가지의 회의적 답변이 포괄적이고 막연한 다른 사태들보다 훨씬 더 해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따라서 상대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한 번쯤은 자신을 타자화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늘 비열하게 자신의 부조리를 합리화시키거나 자신은 항상 옳아야만 한다는 착각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최소한이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이외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절대적일 수 없다.


존재자의 삶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해가고 있다. 어떠한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존재가 하나의 현실 사태 앞에서 다른 현실 사태로 전환되고 시간과 공간이 움직여 이동하는 작용을 변화라고 한다면 사람은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다. 그 변화라는 것은 의지를 통해 도덕적, 이성적으로 고양될 수도 있고 불가항력에 의한 실존적 상황이나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타락할 수도 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한 곳이 인간 사회다. 사회란 문명으로 치장된 힘의 생태계에 불과하다.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또한 위험한 것은 그러한 사회를 조장한 인간이 이러한 진실에 대해 자주 회의하기 보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를 문명적 인격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체의 잔인성, 그것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야만과 인간 존재 오류에 대한 경각심이 문명을 문명답게 만든다. 그러나 물신 숭배의 문명에 대한 맹목적 예찬은 점점 이러한 경각심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인간 존재들의 사회는 얼마나 풍부한 역설을 보유하고 있는 곳인가. 인간은 동물의 종(種)의 하나일 뿐이다. 사회라는 것은 동물의 속성을 위장하기 위한 먹이사슬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회적 힘을 통해 이 먹이사슬을 관리하고 유지하고 있음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이 먹이사슬 같은 인간 사회의 조직을 통해 자행되는 야만이 갈수록 교활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있는 것이다. 


사회 상위 계급의 정점에 있는 인간 존재는 그 하위의 인간 존재들을 향해 부와 권력에 순종하도록 선의 미덕을 설파한다. 그들이 교육을 통해 주입하는 선량함이란 불의한 힘에도 순종하는 온순하고 비열한 노예적 굴종이다. 이 비굴한 순종을 선량함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위선에 대한 정항은 정의로운 용기—비록 인간들의 세계에는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전제하더라도 말이다—라고 할 수 있다. 비굴하게 복종을 강요하는 힘이 권력이라는 인간의 질서라면 저항은 참된 인간형인 인간 존재에 의해 이 세계에 실현되는 신의 정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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