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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Dec 25. 2016

존재 5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7

인간 존재의 삶이 더 비참해진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 순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존재자로서 특정 지어질 수 있는 것은 인식과 비판에 의한 자각을 통해서이다. 이미 존재하는 통념이라는 세상의 사태에 대한 현상과 작용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이다. 또한 주림과 빈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존성을 떨쳐냄으로써 고유한 존재자로서 특정되고 고유성이라는 뿌리를 세계에 내려 홀로 설 수 있게 됨으로써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존재자의 삶을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 그 순간순간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 존재도 그 과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존재자의 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홀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길고 지루한 여행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통과 좌절을 동반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인간 존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시간을 통해, 고통과 좌절과 방황의 결을 따라 인생은 엮어지고 펼쳐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 존재 대부분은 죽음의 순간에 삶과 행복과 고마움과 더러는 아쉬움과 그리움과 사랑을 어떠한 현상의 형태로 남기고 또 다른 삶을 향해 떠나간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토록 기나긴 여정을 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 존재는 미지의 안식처로 떠나갈 수 있는 것이다.그것은 고통으로, 좌절과 눈물로, 때로는 저주로 얼룩진 것이 삶이라는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죽음이라는 것이 필멸하는 인간 존재에게 새겨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다. 세계에는 있는 것만 있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만 ‘있다’할 수 없고, 있는 것만 ‘보인다’ 할 수 있는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작용하거나 다른 공간과 시간의 차원에 있거나 하는 식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작용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중에 하찮은 것이 있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하찮은 것 중에 고귀한 것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중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정도 최소에서부터 정도 최대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범위의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작용의 범위 안에서 가치를 발현하고 있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정도의 가치만큼 존재하는 것으로서 ‘있게’ 한다.


인간 존재 대다수의 대부분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사회라는 울타리의 가장자리에서 움츠린 존재자의 삶이라면 그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평가절하—사실 인간 존재가 그 의미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비참하게 한다. 신은 인간을 있게 할 수 있으나 인간은 상대적인 관계 안에 인식할 수 있을 뿐이므로 인간의 인간 존재 자체와 그의 의미에 대한 판단은 정당하지 못하며 따라서 판단 결과는 거의 오류에 해당한다—하게 된다. 인간 존재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폄훼하도록 계급이라는 사회 생태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강요받고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절망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삶일 수도 있다. 삶의 고귀함은 바로 이 왜곡된 사회 의식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왜곡된 의식에 저항하지 않는 한 인간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소수는 사회 계급의 정점에서 명령하고 다수는 그 아래에서 굴종하며 살아가는 성실하고 선량한 노예로서 말이다.



인간은 종종 사소한 불쾌감과 함께 눈을 뜨며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불쾌한 아침의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울 때가 있다. 특별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생태계의 상위 계급을 차지한 인간 존재들의 불쾌감은 견딜 수 없는 것이고 그 하위에 있는 이들의 불쾌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라는 위하감으로도 이미 불쾌감 자체도 불공평한 출발선상에 있기 때문이 이에 대해 인식하는 인간들의 순간적인 불쾌감은 하루를, 때로는 온 생애를 지배하는 그런 비중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상위 계급의 인간들에 의해 발생하는 타자에 대한 미움의 정체는 매우 사소한 불쾌한 감정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인간 존재의 오만은 계급이라는 사회 생태계의 부조리 왜곡에서 시작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근거, 그러나 사실은 왜곡하고 날조하기 위한 근거들로 개인이나 집단의 우월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야만성이 있다. 미움이나 이유없는 불쾌감의 원인이 있다면 사실 대부분이 이러한 우월감에 승복하지 않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오만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존재가 인간답기 위해서 나는 인간이 정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존재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위해서 나는 인간이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한 인간의 지성과 양심 속에서 공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논리적인 근거들의 조작, 왜곡, 날조에 의해 정직을 훼손할 수 있고 정직은 강박을 통해 논리의 창조성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이기적인 문명인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때가 있다. 정직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선량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논리적이기 위해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논리적이기만 한 것은 그 차가운 이성의 칼이 자기 영혼의 목을 벨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인간 이성의 논리가 타인의 이성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논리를 통해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논리를 통해 최소한의 지적 근거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에 동참할 만큼 현실적이고 성숙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에 상대하는 타자가 맞는 것을 맞다 하며 승복할 수 있는 정직함과 이성적인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즉, 논리적인 설득은 주자아는 존재자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승복하는 타자의 이성과 이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인간은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그것을 통해 역사를 일구어 진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다. 이 지성의 근저에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환경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삶의 환경이 나아진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은 사소한 것에도 상실감을 맛보고 아무런 현실 사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는 존재다.



무엇인가 고갈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존재자의 내면이 불안의 표면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무의식의 생명력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어떤 영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한다. 통념의 억압과 강요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긴장감이 이완된 정신의 자유로움, 그 자유가 선사하는 향기를 받아들이며 관념의 광장 안에 머물게 하고 고스란히 그것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주 인간은 상실과 좌절을 맛보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한다. 바람을 따라 해가 지는 곳, 다른 세계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듯 달아나고 싶어 한다. 어떤 것도 선뜻 정하지 못한 존재자의 마음은 그 때 그 순간뿐, 이도 저도 아닌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때문에 인간 존재는 갈망하게 된다. 혼란에 기초한 욕망, 성취에 안달 난 목적에 대한 집착이 혼재하는 갈망 이전에 인간 존재는 타자를 갈망하는 비참의 상태를 전제로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 존재의 삶이 더 비참해진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 순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좌절하기 때문에 비로소 고통을 느낀다. 좌절하기 이전 존재자는 애써 고통을 외면하려고만 한다. 그는 고통의 순간을 매우 대견스럽게 여기고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부—그는 영웅적인 자아도취에 빠져있다—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좌절하게 된 바로 그때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이 인간 존재이기에 피해갈 수 없는 비참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과 비참의 공감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며 관계의 공감대 속에 동참하지 못한다.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존재자와 타자의 개별적 관계성에서 존재와 존재의 사회적 관계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삶의 고통은 인간 존재에게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재료로, 공감의 바탕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좌절했다면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동안 먼 훗날에라도 그 좌절의 의미를 짚어보며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삶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든 좌절과 상실을 보상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하고 부정한 욕망으로 비약하기 이전에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물으며 찾고 번민하기를, 방황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통해 존재자로서 깨어 나야 하는 인간 존재에게 생각이 많다고 말하는 것,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 고민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 방황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 그것은 인식 못 하는 무리 진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고유성을 추구하는 존재자의 자유 의지에 대한 무책임한 억압이며 폭력이다.


사유라는 것에게 고통과 번민은 위로와 위무를 위한 사태가 아니다. 인간 존재에게 그리고 각 존재자에게 삶의 고통은 일상이며 이 일상을 통해 내면은 여물어가고 그를 더욱 인간답게 한다. 


인간은 고통 중에도 생각한다. 고통이 가중될수록 그 고통을 떨치기 이해 열렬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번민하며 사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성을 통한 사유는 의미를 향한 인간 존재 내면의 거대한 운동이다. 이 거대한 사유가 소모적 무의미로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황하고 번민하며 몸부림쳐야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만의 고유한 자유의지이기에 힘차고 격렬한 사유의 운동만큼 존재자 내면의 우주는 팽창하며 고양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가 고유한 존재자이기 위해서는 모든 통념은 물론 비논리적 지식에 대해, 부정한 권세가 주입하는 맹목적 당위에 대하여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통이란 삶과 사유에 소여(掃如)하는 재료의 하나이다. 번민이라는 사유의 방황이 무의미한 상실로 귀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또한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도대체 왜? 라는 회의적인 도발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의 존재함의 역설적 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역설적인 한계가 인간 존재를 ‘숨 쉬는 생명체’라고만 정의하도록 무기력하게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존재함의 과정은 일상의 모든 사태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현상에 저항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욱 완전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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