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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Nov 27. 2016

존재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4


시간은 절대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시간마저 돈으로 환산해야 한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란 재화라는 소비적 도구 가치로
밥과 고생과 시간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고
그 뜨겁고 잔인한 숯덩이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야만 한다




✽ 


인간은 존재한 이후에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는 사유의 힘은 인간 존재를 더욱 성숙 시킨다. 인간은 이러한 사유를 통해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런 이후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의미—존재를 목적을 합리화시키는 그런 소모로서의 의미, 때로는 이러한 의미 부여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존재를 수단화,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를 부여한 뒤에 목적을 찾게 된다면 인간은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발견되고 목격된 상대적 존재이기 이전에 스스로 눈뜬 존재자로서 고유한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아의 존재 인식은 가장 강력한 사유의 동기이며 인식 주체의 동기가 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는 타자는 타자로서, 세계는 세계로서, 현상의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인식하고 자신과 타자와 세계와 관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아름답게 살기 위해, 그것에 소요되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존재함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존재자는 타자의 대상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자의 추종 대상으로서도, 사회 사태의 불만 해소 대상으로서도, 지배의 대상으로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권리라고 불리는 자연적 권리는 고유한 존재자만이 인식할 수 있고 이 인식을 통해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인식이 무디거나 없다면 인간의 고유한 자연적 권리를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되고 그러므로 누릴 수 없게 된다. 그저 사회적 동물로서 존재하기만 할 뿐이며 힘의 지배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고유하면서도 자연적인 권리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권리들이 체제, 체계 안에서 일반성을 갖추게 되고 그 일반성은 다시 일정한 법칙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보편성을 확보하고 세계의 질서로 자리잡아 인간 존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정한 법칙을 확보하는데 실패하거나 확보된 보편성이 힘과 세력 앞에 무기력해져서 인간은 파괴되기도 한다.


존재하는 만물은 필연적으로 쇠퇴하며 소멸한다. 우리들의 세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한시적인 존재가 바로 생물체이다. 그 중 하나가 인간 존재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소멸하는 짧은 시간의 한계를 가졌다. 존재자의 욕망은 이 진리를 망각하게 하거나 둔감하게 만든다.  과연 무한하게 진보하며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한다. 그러나 이 무한한 진보와 영속되는 시간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것만은 영원할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욕망은 인간 존재의 가장 분명한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 충동으로서 욕망은 이성의 인식을 자극한다. 이런한 존재의 욕망은 성취를 위해 인간 조차 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대상화하고 소모시키고자 한다. 타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까지도 그렇게 내몬다. 그러나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소모는 육체라는 물질과 인생이라는 시간 뿐이다. 인간 욕망은 한정된 것을 마치 모든 것처럼 다루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바로 그것으로 인해 욕망이 발현되는 자신의 모든 것은 더 빨리 더 비참하게 존재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존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존재자의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도 동일하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 뿐인 절대적 고유성’이라는 특별함을 갖고 있다. 



오늘날 인간 존재의 특별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착취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천박함을 젊음이라는 미래의 파괴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자기학대와 자기파괴를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삶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고생을 사서 하라고 하기보다 인생은 절대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해 주어야 한다.


해가 뜨기전 캄캄한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이 생의 터전에서 붐비고 있다는 것은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나 겨우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루는 너무 길고 고단하다. 


시간은 절대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겠지만 돈이 없어서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시간마저 돈으로 환산해야 한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란 재화라는 소비적 도구 가치로 밥과 고생과 시간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고 그 뜨겁고 잔인한 숯덩이 위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비참은 가끔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뿐 존재의 본질적 고통에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고결함을, 강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불굴의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불굴의 의지가 인간을 존재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가 영혼과 더불어 불멸할 수 있다는 시적인 말은,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 의지가, 인간 존재가 고작 한 끼의 생존 앞에서 발버둥 칠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 멀리서 아름답게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공허한 말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늘 마주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인간의 맞은편에서 혹은 같은 편에 서서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설레고 떨리며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다. 존재자는 인식을 통해 제일 먼저 자신을, 그 이후에 타자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타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해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자가 타자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인간이 선량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량함이 아니라 휴식과 시간과 돈과 무엇보다 한 끼니의 식사다. 이 네 가지는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는 상관관계에 있거나, 종속관계에 있는 인간들의 현실이며 서로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휴식과 돈, 시간과 식사는 동시에 얻을 수 없고 언제나 상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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