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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Sep 01. 2020

노처녀 김삼순은 서른이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옛날 드라마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VOD 서비스를 뒤적거렸다. 평소 <하얀거탑>이나 <비밀의 숲>처럼 의미심장한 내용의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왠지 말랑말랑한 내용의 드라마가 보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리 집 텔레비전은 나름 IPTV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났으나 넷플릭스 같은 고급 서비스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AI 같은 첨단기능은 기대할 수 없고, 나에게 맞춘 추천 동영상도 제공되지 않는다. 무언가 시청하려면 방송사별 카테고리로 들어가든지 케이블업체에서 선정한 추천작 모음을 일일이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람들 보는 눈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 명작 드라마라고 모아놓은 페이지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드라마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뭐가 있는지 다 살펴보고 그중에서 고르자는 심산으로 페이지를 쭉쭉 넘겼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 이름은 김삼순>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드라마였지, 라고 생각하고 넘기려는 찰나, 그 섬네일을 보고 있으니 약간의 호기심 같은 게 샘솟았다. 같은 드라마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일까? 마치 소년기에 읽은 고전을 청년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을 경험하는 것처럼,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본 이후 접한 적이 없으니 15년 만이었다. 워낙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라 고민하고 말고도 없었다. 나는 곧장 시청하기를 눌렀다. 십수 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하는 기분이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을 다시 보았을 때 맨 처음 대면한 감정은 충격과 당혹감이었다. 세상에 김삼순이 서른 살이었다니! 그걸 보는 나는 벌써 서른세 살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한참 어른인 것 같았던 그녀가, 이제는 내가 어여삐 여기는 동생들과 비슷한(혹은 그 동생들보다도 어린) 나이였다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이별 여행을 가네마네 하며 갖은 지랄은 다 떨었던 현진헌과 유희진의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 이 이야기를 주변에 들려주었을 때의 반응은 다들 한결같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뭘 안다고”


이 드라마를 기억이라는 상자에 넣어두고 잊고 살았던 15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그 상자 위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많이 변해있었다. 사회의 평균 기대수명이 증가하면 그 너비만큼 인생에 대한 감각도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법. 이제는 그 누구도 서른 살밖에 안 된 청년에게 결혼이나 맞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령 서른여덟에 결혼한다고 한들 늦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다. 보라는 선은 안 보고 호랑말코 같은 자식이나 만나고 다닌다며 박봉숙 여사에게 매타작 맞던 김삼순으로서는 억울할 일이지만, 노총각‧노처녀라고 구박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내게 특별한 드라마다. 특별하다는 형용사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면 딱 질색이다. 남들이야 연애를 하든 말든 그들의 애정사에는 관심이 없다. 상대방에게 애인 있냐는 질문 따위는 일절 하지 않는다. 연애‧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A라는 사람은 나에게 그저 A일 뿐이다. 무엇보다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있으면 현타가 온다. 내 현실은 시궁창인데 남들 연애하는 꼴 봐봤자 배만 아프지, 이런 생각.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보는 친구들은 그런 작품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대리만족보다는 상실감이나 박탈감이 더 크다. 따라서 그동안 나에게 로맨틱 코미디가 가져온 의미를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표현을 빌려서 정의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현대의 로맨틱 코미디는 인싸들 전체의 공동 관심사를 반영하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은 김삼순>이 처음 방영한다고 했을 때, 흔해 빠진 신데렐라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그 예측이 틀린 건 아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도 큰 틀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유명호텔 소유주의 아들이자 번듯한 레스토랑의 사장인 진헌과 방앗간 집 셋째 딸 삼순의 러브스토리. 거기에 재력과 능력, 외모까지 모두 겸비했으나 인간성은 다소 결여된 남자 주인공까지. 이 모든 요소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와 궤를 같이한다. 나는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처음엔 큰 기대를 않고 코믹한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를 지켜봤다. 하지만 삼순이의 매력에 빠져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 우리의 일상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속의 그녀는 결코 신데렐라가 아니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이력서 들고 면접 보러 다니는 평범한 취준생이었고, 굳게 결심한 다이어트는 얼마 못 가 냉장고 안 재료들과 함께 비벼 먹는 나약한 청춘이었다. 비빔밥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크 죽인다 죽여, 천국이 따로 없네. 인생 뭐 별거 있어?”


그녀라고 해서 자존감이 충만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삼순은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극 중 김삼순은 나이 많고 뚱뚱하고 못난 자신에 대한 결핍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 김이영이나 유희진과 티격태격할 때면 예뻐서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거나 자책한 건 아니다. 단 한 번도 열악한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대한민국 최고의 파티셰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계약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진헌의 모친 메기 여사를 대면했을 때도 주늑 드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 덕분에 방앗간을 운영하셨던 삼순의 아버지와 시장에서 조그맣게 일수를 놓고 계시는 삼순의 어머니는 식품업‧금융업 종사자가 될 수 있었다. 만일 삼순의 남자친구가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라고 자신을 다그친다면, 그녀는 “어떻게 그래요…”하며 움츠러들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것 같다. “이 자식이, 어디 어린 놈의 자식이 반말 찍찍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돌연 사표를 내고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윤현숙 비서(우). "마냥 젊을 줄 알았다"며 이제라도 꿈을 찾아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iMBC


<내 이름은 김삼순>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 김삼순과 더불어 내게 큰 울림을 준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큰둥 아줌마, 윤현숙 비서다. 극이 전개되는 내내 시큰둥한 표정과 목소리로 신스틸러 노릇을 톡톡히 한 그녀는 마지막 회에 이르러 사직서를 제출하고 세계 일주를 떠난다. 느닷없는 사표에 당황한 나사장이 더위 먹었냐고 따지자 이 역시도 시큰둥하게, 그러나 진정성 있게 대답한다. 마지막 남은 자기 꿈이라고, 마냥 젊을 줄 알았다고. 나는 그녀가 눈물로 만류하는 나사장을 뿌리치고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장면에서 왠지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윤 비서뿐만이 아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속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인물들이었다. 미국에서 이혼하고 돌아온 언니 이영도, 늘 희진의 곁을 지켰던 헨리도, 하다못해 끝까지 삼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추근댄 바람둥이 현우도, 그 누구 하나 타인의 시선에 자기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옳다고 여기는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 인생 뭐 별거 있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감이 위축되다 못해 원자 단위로 조각조각 부수어질 때, 나는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알프레드 디 수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 사랑이 비단 남을 향한 것만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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