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은 우리의 성장기였다
나는 <무한도전>을 처음 본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늦은 봄이었다. 보통 5월은 중간고사 이후 축제니 체육대회니 하는 것들로 인해 생활리듬이 깨지는 게 용납되는 계절이다. 물론 나는 축제나 체육대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5월이 되면 학교 분위기에 휩쓸려 몸도 마음도 느슨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사 풀린 기계마냥 늘어져서 TV만 시청했다.
그날도 잠을 뒤척이며 하릴없이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공중파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들을 몇 번이고 재방송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유재석이 진행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잠시 채널을 고정했다. ‘갤러리 정’으로 이름을 날렸던 정형돈, 한창 말 많은 방송인으로 뜨고 있는 노홍철 등이 출연했고 많은 방송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이병진과 표영호도 함께 나왔다. 게스트는 박명수였다. 그들은 허접한 러닝셔츠 바람을 하고서는 무슨 결의라도 다지듯 비장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비장함의 목적이었다. 이름하여 열탕오래참기. 펄펄 끓는 물도 아니고 고작 40도를 조금 웃도는 열탕에 들어가는 게 뭐 그리 힘든지. 그런데 나는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는 그들의 다음 장면이 내심 궁금했다. 열탕으로 들어갈까? 들어간다면 미션의 목표대로 30초를 버틸 수 있을까? 예능이니까 참는 척하다가 뛰쳐나오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여섯 남자는 무릎 정도만 발을 담그고는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분위기상 실패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오두방정을 떨며 열탕을 나온 그들은 몸을 식히기 위해 바로 뒤편에 있는 또 다른 탕으로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거기도 ‘화상주의’라는 푯말이 세워진 열탕이었다. 그 순간 숨이 넘어가도록 껄껄 웃었다. 평소 TV를 보면서, 더욱이 혼자서는 좀처럼 소리 내서 웃지 않는데 목욕탕 자연배수와 인간들의 물 퍼내기 중 어느 쪽이 더 빠른지 대결을 펼치는 그 방송을 보면서는 정말 쉴 새 없이 웃었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바로 <무모한 도전>에 매료되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MBC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전에 못 봤던 3회 차를 모두 결제해서 단숨에 시청했다. 황소와 줄다리기를 하고, 오리배로 유람선과 속도전을 펼치는 콘셉트는 <유재석과 감개무량>, <천하제일 외인구단>에서 봐 왔던 ‘유재석과 오합지졸’ 시리즈의 완성판 같이 느껴졌다. 원초적이면서도 조금은 허술한 이 방송이 좋았다. 내 개그 코드와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한도전>에 관해서 나는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황소와 줄다리기하던 시절부터 시청해온 몇 안 되는 팬이라는 점에서다. 심지어 그들이 <무리한 도전>이라는 혹독한 시절을 겪을 때에도 그 곁을 지켰다. 나는 산소통을 메고 평균대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윤석을 보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었는데 대한민국 대다수 시청자에게는 그게 한심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 <무리한 도전>은 단 6회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무한도전>은 ‘거꾸로 말해요 아하’로 기억되는 ‘퀴즈의 달인’으로 캐릭터를 구축한 뒤 리얼 버라이어티로 다시 한번 대대적인 포맷 개편을 단행했다. 가을소풍 특집, 수능 특집, 티에리앙리 특집, 해병대 특집 같이 <무한도전>의 레전드로 회자되는 특집들이 이때 나왔다. 그 이후의 행보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스물아홉의 나는 매일 같이 우울과 불면을 겪었다. 그때 나는 인생의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지금처럼 계속 꿈을 향해 달려야 하나, 아니면 이제라도 취업시장에 고개를 들이밀어야 하나. 친구들은 번듯한 기업에 들어가 차를 사고 결혼도 한다는데 계속 이렇게 반백수로 살아도 되는 걸까. 말로만 듣던 정치 낭인이 되는 건 아닐까. 집안도 어려운데 이러다가 인생을 조질 수도 있겠구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올해가 취업이 가능한 마지막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당장 다음 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실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스물아홉을 넘기면 서른이었고, 그 서른을 또 어떻게 겨우 넘기면 서른하나였다. 보통의 인생에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감히 새로운 도전을 꿈꿀 수 없었다.
이노 다다타카는 50세가 되는 해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그리고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천문학을 배우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막부에서 천문관측과 역 제작을 맡고 있는, 19살 아래의 다카하시의 문하생이 되었다. 다카하시는 노년에 천문학에 매진하는 이노의 모습에 크게 감탄했다. '별을 관측하는 어른'이라는 의미의 스이호센세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높이 평가했다.
열정적인 이 스승과 제자의 목표는 지구의 정확한 크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네덜란드로부터 전래한 지식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위도 1도의 정확한 거리를 구하지 못해서 기존의 역을 개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리를 파악해야만 새로 완성될 역인 간세이레키(寬政曆)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노 다다타카가 제안한 것은 측량이었다.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의 차이를 통해 위도를 파악한 뒤 거기에 두 지점간 거리를 대입하면 지구의 둘레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리였다. 이를 위해선 에도와 위도상으로 상당히 먼 거리에서 측량을 해야하는데 당시 유력한 후보지였던 에조치(홋카이도의 옛 지명)는 민간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노 다다타카와 타카하시 요시토키가 막부를 설득하기 위해 떠올린 명분은 지도 제작이었다. 막부 역시 국방을 위해 지도 제작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결국 그들은 지도 제작을 조건으로 막부의 통행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1800년, 이노 다다타카는 나이 55세가 되던 해에 총 9명의 측량대를 꾸려 에조치로 측량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낮에는 측량을 하고 밤에는 천문관측을 하면서 홋카이도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하루 40km씩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6개월간의 원정을 마친 뒤에는 에도로 돌아와 기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해 막부에 제출했다.
막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위성사진과 겹쳐보아도 차이가 거의 없을 만큼 매우 정확했기 때문이다. 이노는 지구의 둘레를 재러 갔다가 본의 아니게 자기 안에 내재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셈이었다. 막부는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한편 일본 전역의 지도 제작도 의뢰했다. 이를 계기로 1800년부터 1816년까지 총 10차례에 걸친 이노의 측량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여행을 모두 마치고 에도로 돌아왔을 때 이노 다다타카의 나이는 71세였다. 이듬해부터 전일본지도 제작에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3세가 되던 1818년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남은 작업은 제자들에 의해 계속 되었고 지도는 결국 이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인 1821년 7월 <대일본연해여지전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노즈(이노의 지도)라고 명명된 그 지도가 에도성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1/36000 축척 대지도 214매, 1/216000 축척 중지도 8매, 1/432000 소지도 3매로 구성된 지도는 당대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정확도와 섬세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노가 근대적 지리‧천문학은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측량장비를 동원해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도가 너무나도 정확했던 탓에 막부는 이를 바로 공식 문서고인 모미지야마문고에 비밀보관 했다. 외부유출은 1860년대까지 금지되었다. 일본인들의 평균 연령이 40대에 머물던 시절, 나이 오십에 하던 일을 다 털어내고 천문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가 세운 업적이었다.
사실 이노 다다타카의 사례가 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행운도, 노후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만큼 넉넉한 경제력도 주어지지 않는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21세기 한국사회에 떨어졌다면 그는 도전을 사치재로 분류했을 것이다. 도전은 시간과 돈이 들고 또 때로는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요구하는 값비싼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도전이란 대개 피치 못할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많다. 더욱이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나기라도 한다면 그 대가는 참혹하다.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인생. 그래서 내게도 도전은 늘 살얼음판 위를 걷듯 두렵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리얼궁상 3D 프로젝트’, ‘대한민국 평균이하’와 같은 콘셉트로 시작한 <무한도전>은 회를 거듭하며 대한민국 최고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소소한 도전들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이기도 했다. 컨베이어벨트와 사람 중 누가 더 연탄을 빨리 나르나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그들은 남들이 좀처럼 엄두 내기 어려운 일들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봅슬레이나 프로레슬링, F1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비록 프로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완수해냈다. 성공이 아닌 도전이 쌓여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을 만든 것이다.
<무한도전>은 멤버들의 성장기인 동시에 그것을 시청하는 나의 성장기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입대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 인간의 성장이 가장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시기를 <무한도전>과 함께 했던 이유에서다. 나는 현실에서 겪고 있는 좌절과 정체를 <무한도전>이 도전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달랬다. 그게 불도저와 자동차 굴리기 대결을 펼치는 도전이든, 조정이나 댄스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는 도전이든 상관없었다. 그들의 도전에 내 마음을 투영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매일매일 도전하고 성장하는 삶은, 비록 성공하지 않더라도 과정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을. 나에게 가슴 뛰는 그 열정과 용기를 이식해준 것만으로도 <무한도전>은 충분히 의미 있는 예능이었다.